국내 경제에 어두운 그림자로 자리잡던 한-미 관세협상이 지난달 29일, 경주에서 열린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를 계기로 우여곡절 끝에 마무리됐다.
5개월간의 줄다리기 끝에 외환시장 충격을 최소화하는 투자 구조를 확정하고, 자동차 및 부품 관세를 25%에서 15%로 인하하며, 상호 관세율 15% 유지를 수용한 결과다.
이재명 대통령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APEC 정상회의에서 이룬 이 합의는 통상, 외교, 안보, 산업을 아우르는 '신(新) 한미 동맹의 틀'을 완성했다는 평가와 함께, 동시에 한국 경제가 안고 가야 할 복잡한 방정식의 서막을 알린 것이다.
3,500억 달러 투자: '안전장치'와 '부담'의 간극
모두가 알다시피 이번 협상의 핵심 중 하나는 3,500억 달러 규모의 대미 투자 방안이었다.
총투자액은 ▲현금투자 2,000억 달러 ▲조선업 협력(MASGA 프로젝트) 1,500억 달러, 특히 2,000억 달러의 현금투자는 연간 200억 달러 한도를 설정해 외환시장 충격을 최소화하는 데 중점을 뒀고, 일본이 미국과 합의한 5,500억 달러 금융 패키지와 유사한 구조지만, 연간 상한선 설정이라는 점에서 한국의 외환시장 부담을 덜어내려는 노력이 엿보인 대목이다.
정부는 "연간 200억 달러는 우리 외환시장이 감내할 수 있는 범위"라면서 '상업적 합리성' 원칙을 명시하고 투자금 회수 가능성이 있는 프로젝트에 한해서만 투자가 이루어지도록 했으며, 원리금 상환 전 수익은 5:5로 배분하고 20년 내 원리금 회수가 어려울 경우 비율 조정이 가능한 안전장치를 마련했다고 밝혔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이같은 막대한 투자가 국내 투자 여력을 위축시키고, 제조업 공동화를 초래할 수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도 나오고 있는 만큼, 향후 꼼꼼하게 점검해 나가야 할 것이다.
또한 1,500억 달러 규모의 조선업 협력 프로젝트인 '마스가(MASGA)'는 한국 기업 주도로 추진되며, 투자 외에 보증 금융도 포함된다. 필자는 이것이 국내 조선업의 수주 가능성을 높이고 외환유출 부담을 줄이는 효과로 이어지길 기대해 본다.
관세 인하의 빛과 그림자
이번 협상 타결로 한국의 대미 최대 수출 품목인 자동차 및 부품 관세가 기존 25%에서 15%로 인하됐다. 이는 일본과 유럽연합(EU)과 동일한 수준으로, 한국 자동차 업계의 가격 경쟁력을 높여줄 것으로 기대되는 대목이다. 현대차그룹의 경우 연간 3조 원 이상의 관세 부담이 줄어들 것으로 추산되며, 실제 주가 급등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반도체의 경우는 경쟁국인 대만과 비교해 불리하지 않은 수준의 관세 적용을 약속받았다. 의약품과 목재 등은 최혜국 대우(MFN)를, 항공기 부품과 제네릭 의약품, 미국 내 미생산 천연자원 등은 무관세를 적용받게 됐다.
그럼에도 철강 업계는 기존 50% 관세가 유지돼 어려움이 지속될 전망이다. 또한, APEC 정상회의를 계기로 열린 한·중 정상회담에서도 중국의 '한한령' 해제에는 이르지 못해 유통과 항공, 관광, 뷰티 업계가 아쉬움을 나타내며 이번 회담의 '옥에 티'로 남았다.
APEC 경주 선언: '자유무역' 대신 '혁신'과 '문화'
이번 APEC 정상회의에서는 'APEC 정상 경주선언'을 포함한 3건의 문서가 채택됐다. '연결, 혁신, 번영'을 3대 중점 과제로 삼아, 특히 인공지능(AI) 협력, 인구 구조 변화 대응, 그리고 문화창조산업(CCI) 분야에 주목했다.
APEC 정상 문서 최초로 문화창조산업을 아시아·태평양 지역의 '신성장동력'으로 인정하고 협력 필요성을 명문화한 것은 한국의 K-컬처 확산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으로 기대된다.
특히, 'APEC AI 이니셔티브'와 'APEC 인구구조 변화 대응 공동 프레임워크' 채택은 회원국들의 공동 인식과 협력 의지를 잘 나타낸 대목이다.
하지만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점은 과거 선언문에 포함됐던 '자유롭고 개방적이며 공정한 무역' 지지 문구와 세계무역기구(WTO) 중심의 다자무역 체제 지지 내용이 빠졌다는 것이다. 이는 '자유무역' 대신 '각자도생'이라는 글로벌 뉴노멀을 재확인한 셈이며, 한국이 미·중 사이에서 복잡한 외교·경제 방정식을 풀어가야 하는 과제를 떠안게 됐음을 시사한다.
젠슨 황 CEO와의 만남: AI 협력의 서막
APEC 정상회의 기간 중 이재명 대통령은 젠슨 황 엔비디아 CEO를 만나, 2030년까지 그래픽처리장치(GPU) 26만 장 공급 및 국내 메모리 반도체 기업과의 고대역폭메모리(HBM) 조달 확대 추진에 대한 약속을 받아냈다.
이 중 5만 장은 정부가 구매해 국가 AI 컴퓨팅센터 등에 활용하고, 나머지 21만 장은 삼성전자, SK하이닉스 등 민간 기업이 구매할 예정이다. 이는 한국을 아시아·태평양 지역의 AI 수도로 도약시키겠다는 비전과 맞닿아 있으며, AI기술 협력의 새로운 마중물인 만큼, 들뜬 마음을 가라앉히고 차분히 추진해 나가야 한다.
'신 한미 동맹'과 남겨진 과제
이번 한미 관세 협상 타결과 APEC 경주 선언은 단순한 통상 합의를 넘어 경제, 산업, 안보를 아우르는 '신 한미 동맹'의 재정립으로 평가되고 있다.
이재명 대통령은 북한과의 대화 재개를 위한 중국의 역할을 당부하며 한반도 평화 정착에 대한 의지를 밝혔고, 핵추진 잠수함 연료 공급 요청 등 안보 분야에서도 새로운 공감대를 형성했다.
그렇다고 마냥 좋아할 일은 아니다.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는 말처럼, 이번 합의로 관세 불확실성은 해소됐지만, 미·중 갈등이라는 거대한 파고는 여전히 남아 있다. 또한, 3,500억 달러라는 막대한 대미 투자가 국내 투자 여력 위축으로 이어질 가능성과 중국의 '한한령' 해제 불발 등은 한국 경제가 풀어가야 할 숙제로 남았다.
결국 우리 정부와 기업들의 몫은 이러한 복잡한 지정학적, 경제적 방정식을 풀어내면서 '실리'를 챙기는 동시에 '균형'을 유지하는 교섭 역량에 달려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경주 APEC에서 타결된 한미 관세 협상은 한국 경제에 새로운 기회와 도전 과제를 던지고 있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된다.
특히, 단기적인 긍정적 효과를 바탕으로 중장기적인 우려 사항에 대한 철저한 대비와 전략적 활용을 통해 'K-제조업 영토 확장'의 기회로 삼아야 하고, 이를 위해 정부와 기업, 그리고 모든 경제 주체의 긴밀한 협력과 지혜가 어느 때보다 절실히 요구되는 시점이다.
이번 정상회의 결과는 정부의 외교능력과 기업의 글로벌 경쟁력이 이뤄낸 합작품이다. 한마디로 오늘의 대한민국 경제력과 기술력이 뒷받침되지 않고서야 어떻게 이런 일이 특정 집단의 노력만으로 가능하겠는가.
일부에서 서로 저희들의 공인양 호들갑 떠는 일이나 한편에서 이번 정상회담 공과를 놓고 서로 잘났다고 떠들기 보다는 이미 나온 결과를 놓고 대한민국을 걱정하는 모두가 머리를 맞대 바람직한 대응방안과 세부적인 해결책을 찾아 국익을 위한 최선책이 무엇인가를 고민해야 할 때 인 것은 분명하다. 각자 소임을 다해 삶의 터인 조국의 미래를 생각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폴리뉴스] 편집국장 고성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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