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컬처 이준섭 기자] 1920년대, 영화 산업의 탄생과 함께 예술의 지형은 급격히 변화했다. 연극에서 무성 영화, 무성 영화에서 유성 영화로 이어지는 격동의 시대 속에서 배우들은 생존과 예술적 신념 사이에서 끊임없이 고민해야 했다. 뮤지컬 ‘그레이하우스’는 이 시대적 전환기에 놓인 배우들의 삶과 선택, 그리고 그로 인해 발생하는 내적 갈등을 치밀하게 조명한다.
작품은 영화 제작자 커트 웨스트가 배우 주니어 A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는 극중극 구조를 통해 과거와 현재를 유기적으로 연결한다. 이 구조는 관객이 시대적 변화를 체감하며 배우들의 내적 갈등을 입체적으로 느낄 수 있도록 한다. 연극과 영화, 무성 영화와 유성 영화 사이에서 자신의 예술적 길을 고민하는 두 인물, 제롬 밀러와 키이스 벨의 대비는 극의 중심축을 이루며, 변화와 적응, 그리고 선택의 문제를 선명하게 드러낸다.
제롬 밀러는 무성 영화의 시대적 도래와 함께 표정과 몸짓만으로 감정을 전달하며 주목받는 배우로 성장한다. 그러나 제롬은 개인적 트라우마와 좌절 속에서 꿈을 포기할 위기에 처한다. 제롬의 이야기는 성공 서사가 아니라, 예술적 존재로서 자기 자신과의 싸움이라는 면에서 깊은 울림을 준다. 제롬의 성장은 관객에게 시대적 흐름 속에서 적응하며 살아가는 인간의 고뇌를 보여준다.
반대로 키이스 벨은 가난과 불확실한 환경 속에서도 연극 무대에 대한 간절한 열망과 타고난 재능으로 자신의 길을 개척한다. 키이스는 환경과 한계에 굴하지 않고, 연극이라는 예술적 신념을 끝까지 붙잡는 모습을 보여준다. 두 인물의 선택과 성장 과정은 서로 상반되지만, 결국 ‘자기만의 방식으로 존재를 증명한다’는 공통의 주제를 공유한다.
특히 극은 시대적 배경을 단순한 무대 장치로 사용하지 않고, 음악과 서사에 적극적으로 녹여낸 점이 돋보인다. 주미나 작곡가는 1920~30년대 미국을 배경으로 재즈적 요소를 활용해 관객이 자연스럽게 시대적 몰입을 느낄 수 있도록 구성했다. 음악은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등장인물의 감정선과 시대적 흐름을 연결하는 중요한 장치로 기능하며 극적 긴장감을 높인다.
캐스팅 역시 작품의 몰입도를 크게 끌어올린다. 제롬 밀러 역에는 김재범, 유승현, 김지온, 박정혁이, 키이스 벨 역에는 주민진, 최석진, 선한국, 홍기범이 참여한다. 각 배우의 연기력과 무대 장악력은 극중극 구조와 맞물려, 관객이 시대적 변화와 개인적 선택 사이에서 흔들리는 캐릭터의 감정을 깊이 체감하게 한다.
창작진 또한 작품의 완성도를 높이는 중요한 요소다. 성재현 작가는 시대적 변동 속에서 인간이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 발버둥치는 모습을 세밀하게 포착하며, 연출 황두수와 음악감독 홍정의는 극의 서사와 음악을 긴밀하게 연결한다. 이러한 협업은 작품 전반에 걸쳐 시대적 분위기와 인물 내면을 동시에 살아 숨 쉬게 만든다.
‘그레이하우스’는 시대극이나 영화 산업사를 담은 작품이 아니다. 배우라는 직업을 통해 삶과 예술, 변화와 적응의 문제를 심층적으로 탐구하며, 관객에게 오래도록 남는 여운을 제공한다. 기술과 시대가 끊임없이 변하는 상황 속에서도 연기와 예술에 대한 순수한 열망은 변하지 않는다는 메시지는 작품을 관람한 뒤에도 관객의 마음속에 깊이 남는다.
또한 작품은 우정과 갈등이라는 인간적 서사를 결합해, 관객이 시대적 변화를 단순히 역사적 사건으로만 받아들이지 않고 개인적 삶과 연결된 이야기로 체감하게 한다. 제롬과 키이스의 관계 변화, 그리고 서로 다른 선택의 결과는 극적 긴장감을 강화하며, 동시에 인간과 예술의 본질에 대해 생각하게 만든다.
결국 뮤지컬 ‘그레이하우스’는 격동의 시대 속 인간과 예술, 그리고 선택의 의미를 깊이 고민하게 만드는 작품이다. 시대적 변화 속에서 예술과 자기 존재를 증명하려는 모든 이들의 이야기를 생생히 만날 수 있는 무대로 관객을 초대한다. 작품은 시대와 예술, 인간의 내면을 동시에 사유하게 만드는 경험을 제공한다.
뉴스컬처 이준섭 rhees@nc.p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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