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백신 산업이 향후 4년간 빠른 속도로 성장해 2029년에는 약 15억 달러(약 2조 1,500억 원) 규모에 이를 것으로 전망됐다. 세계 평균 성장률의 두 배를 웃도는 수준으로,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백신 자급률 향상과 글로벌 공급망 안정화 노력이 시장 성장을 견인하고 있다는 분석이다.
4일 한국보건산업진흥원(KHIDI)은 미국 시장조사업체 '마켓앤마켓' 자료를 인용한 보고서에서 "국내 백신 시장은 2023년 9억4,840만 달러에서 올해 10억 달러를 돌파한 뒤, 2029년에는 14억9,040만 달러까지 커질 것"이라고 밝혔다.
이는 같은 기간 세계 백신 시장의 연평균 성장률(4%)을 크게 웃도는 9.5%의 증가세다.
최근 한국 백신 산업은 정부의 K-바이오 육성정책과 기업들의 연구개발 투자 확대에 힘입어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
보건산업진흥원 관계자는 "국내 기업들이 mRNA, 벡터, 단백질 재조합 등 차세대 백신 플랫폼을 적극 개발하고 있다"며 "감염병 위기 대응뿐 아니라 글로벌 백신 공급망의 새로운 축으로 자리 잡을 가능성이 높다"고 설명했다.
한국통계진흥원 수출입 통계에 따르면 지난해 국내 백신 수출액은 252만 달러(약 36억원)로, 2019년 대비 76.2% 급증했다.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백신 생산 역량이 확대되면서, 국내 기업들이 중저소득국 중심의 백신 공급 시장에서 두각을 보이고 있다는 분석이다.
다만 수입 의존도는 여전히 높다. 코로나19 백신 도입이 집중된 2021년에는 백신 무역수지가 1,836만 달러(약 263억 원) 적자를 기록했다. 이후 2023년에는 218만 달러(약 31억 원)로 안정화했지만, 필수 백신의 상당 부분이 여전히 해외 기술에 의존하고 있다.
보건산업진흥원이 지난해 12월 기준으로 집계한 결과, 국내 백신 관련 기업은 총 36곳이며 이들이 108개의 백신 연구개발 파이프라인을 운영하고 있다. 질환별로는 코로나19 백신(25개)이 가장 많았고, 인플루엔자(12개), HPV(사람유두종바이러스·10개), 대상포진(7개) 등이 뒤를 이었다.
그러나 필수 예방 백신으로 꼽히는 MMR(홍역·볼거리·풍진) 백신을 개발 중인 국내 기업은 한 곳도 없었다. 이는 국내 백신 산업의 가장 취약한 부분으로 꼽힌다.
전문가들은 "백신 시장이 급성장하더라도, 국가 보건 안보 차원에서 필수 백신의 자급화는 반드시 달성해야 할 과제"라며 "MMR, 폴리오, 파상풍 등 기존 백신의 국산화 연구가 뒤처질 경우 감염병 위기 시 수급 불안이 재현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
보건산업진흥원은 이번 보고서에서 "국내 백신 산업의 안정적인 성장을 위해서는 보건 안보와 경제적 파급력을 함께 고려한 전략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특히 필수 백신 개발의 장애 요소로 꼽히는 △항원 확보의 어려움 △임상시험 비용 △낮은 수익성 문제 등을 극복하기 위한 정부의 지속적인 지원이 필수적이라는 지적이다.
보건산업진흥원 역시 "국산화되지 않은 백신의 연구개발이 점차 확대되고 있지만, MMR 등 주요 필수 백신의 파이프라인 확보가 여전히 미흡하다"며 "공공·민간 협력체계를 강화하고 백신 자급률을 끌어올릴 정책적 지원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경제적 관점에서도 백신 산업의 글로벌 경쟁력 확보가 중요하다는 분석이다.
보고서는 "국내 백신 기업들이 현재는 중저소득국 중심의 수출 구조에 머물러 있으나, 장기적으로 선진국 시장에 진출해야 지속 성장이 가능하다"고 제언했다. 이를 위해 △품질인증(GMP) 고도화 △임상 데이터 국제 표준화 △해외 인허가 지원체계 강화가 병행돼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차세대 백신 기술의 핵심인 mRNA 플랫폼, 세포배양 기반 백신, 다가 백신 개발 등을 위한 인력 양성과 글로벌 공동연구 확대도 필수 과제로 꼽힌다.
업계 관계자는 "한국은 K-방역 이후 국제적으로 신뢰를 얻었지만, 백신 분야는 여전히 미국·유럽·일본이 주도하고 있다"며 "국가 차원의 백신 클러스터 조성과 기술 독립이 뒷받침돼야 시장 점유율을 높일 수 있다"고 말했다.
보건산업진흥원은 백신 산업이 단순한 제약·바이오 분야를 넘어선 '국가 안보 산업'이라는 점을 거듭 강조했다.
보고서는 "감염병 시대의 백신은 국민 생명뿐 아니라 경제 활동 전반을 지탱하는 기반 산업"이라며 "정부가 중장기 R&D 로드맵을 마련하고, 민간이 이를 바탕으로 혁신 백신을 개발할 수 있는 생태계를 만들어야 한다"고 밝혔다.
한 보건경제학 전문가는 "백신 개발은 단기 수익보다는 공공성과 지속 가능성이 중요한 영역"이라며 "정부의 전략적 투자와 민간의 기술 혁신이 균형을 이룰 때 한국 백신 산업이 글로벌 시장에서 경쟁력을 가질 수 있다"고 강조했다.
국내 백신 산업은 이제 양적 성장 단계에서 질적 도약의 기로에 서 있다.
빠른 시장 확대 속에서도 필수 백신의 국산화, 안정적 공급망 구축, 글로벌 진출 전략 등 풀어야 할 과제가 여전히 많다.
보건산업진흥원은 "국가 차원의 백신 자급체계 확립은 더 이상 선택이 아니라 필수"라며 "기술개발과 정부 지원이 동시에 작동할 때, 한국은 진정한 백신 강국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폴리뉴스 이상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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