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미
김수영
내가 으스러지게 설움에 몸을 태우는 것은
내가 바라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그 으스러진 설움의 풍경마저 싫어진다.
나는 너무나 자주 설움과 입을 맞추었기 때문에
가을바람에 늙어가는 거미처럼 몸이 까맣게 타버렸다.
김수영(1921~1968)은 서울 관철동 출생으로 선린상고를 졸업하고, 연희전문 영문과를 중퇴했다. 1941년 동경상대 전문부에 입학했으나 1943년 학병징집을 피해 귀국했다. 1945년 『예술부락』에 시 「묘정(廟庭)의 노래」를 발표하며 등단했다. 해방 전까지 연극활동에 몰두하기도 했다.1950년 한국전쟁 중 미처 피난하지 못해 북한군에 징집, 포로가 되었다가 거제도 수용소에서 석방되었다. 수용소에서 병원장 통역, 석방 후에는 미8군 통역, 선린상고 영어교사로 근무했다. 주간 태평양, 평화신문에서 일했다.
초기에 모더니즘 경향을 보인은 김수영 시인은 4‧19혁명이후 참여시를 쓰기 시작한다. 그 주제는 사랑과 자유다. 모더니즘과 리얼리즘을 넘어서려는 시 세계를 추구했다. 과거와 현재를 넘어서 새로운 세계를 만들기 위해 ‘온몸’으로 시를 쓴 시인이다. 1968년 불의의 교통사고로 갑자기 타계하기 직전에 쓴 「풀」은 1970년대 민중시의 길을 열어놓은 대표작의 하나다. ‘거미’는 1954년에 발표한 시이다.
임군홍 ‘가족’(1950년). 캔버스에 유화물감, 96×126.5cm. 수원시립미술관 제공.
임군홍(1912~1979)은 일제 강점기에 한국과 중국을 오가며 독학으로 자신의 화풍을 실현한 화가다. 임군홍은 해방 후 광고·디자인 회사를 운영하면서 그림을 그렸다. 1948년 운수부의 신년 달력에 월북한 무용가 최승희 사진을 넣었다가 좌익으로 낙인찍혀 옥살이했다. 이런 연유로 한국전쟁 ‘9·28 서울수복’ 때 가족을 두고 잠시 피신하려 북을 넘어간 이후 다시 돌아오지 못했다. ‘가족’은 1950년 6·25 전쟁 발발 보름 전 명륜동 자택에서 아내와 자녀를 그린 미완성 작품이다. 이 그림은 가족들이 집을 팔고 나갈 때까지 이젤 위에 그대로 남아있었다고 한다.
아내 홍우순은 광장시장에서 장사하며 다섯 아이를 키웠다. 가게와 그림은 차남 임덕진이 물려받았다. 그림 속에서 잠자던 아이다. ‘망각의 화가’ 임군홍은 1980년대 국립현대미술관 특별전을 통해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내년 1월 11일까지 열리는 수원시립미술관 개관 10주년 기념전 ‘머무르는 순간, 흐르는 마음’에서 만나볼 수 있다.
갈색 숲에서 /송완순 시, 김수호 곡 /테너 이영화
■ 김시행 저스트이코노믹스 논설실장: 한국경제신문 경제부, 산업부, 증권부, 국제부, 문화부 등 경제·문화 관련 부서에서 기자, 차장, 부장을 두루 거쳤다. 한경 M&M 편집 이사, 호서대 미래기술전략연구원 수석연구원을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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