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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삼 정부 말기였던 1996년 문화체육부는 간행물윤리위원회를 법제화해 음반, 비디오, 만화 등에 대한 포괄적인 규제, 단속 근거를 마련하는 청소년 보호법안을 준비했다. 군부와 신군부 독재를 거치는 동안에도 표현의 자유가 점증해왔던 사정을 고려하면 문민 정부가 뒤늦게 청소년 보호를 명목으로 만화 등에 대한 사전 심의를 도입하려한 이같은 시도는 시대착오적이었다.
특히 이 법안의 근거가 된 청소년 보호 특별법 제정의 시급성을 논한 보고서가 대통령 자문기구인 ‘세계화추진위원회’에서 나왔다는 점 역시 아이러니했다. 특정 세대에게 유해한 매체를 사전 심의해 지정한다는 발상은 세계화와 거리가 멀 뿐더러 오히려 표현의 자유가 갈수록 더 많이 보장돼 가고 있던 세계적인 미디어 시장 추세에 역행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만화계의 반발이 유독 컸던 것은 당시 법안이 다른 매체와 달리 만화는 유통 전 단계에서 사전 심의를 통해 청소년유해매체물로 결정할 수 있도록 했기 때문이다. 결국 만화인들은 9월 ‘청소년보호를 위한 유해 매체물 규제 등에 관한 법률안 제정을 저지하기 위한 범 만화인 공동대책위원회’를 구성해 법 제정 철회를 요구했다. 11월 3일에는 여의도 광장에서 ‘만화 심의 철폐를 위한 범만화인 결의대회’도 열었다.
다행히 만화계가 강하게 반대한 사전 심의 조항은 헌법재판소 판결로 위헌이라는 판단이 나와 법안에서 빠지게 됐다. 그러나 유통 후에도 이중 삼중으로 낙인을 찍는 심의 장치가 여전하다는 것이 만화계 주장이었고, 이 우려는 다음해인 1997년 7월 청소년보호법이 시행되면서 현실로 나타났다.
법 시행이 얼마되지 않아 ‘폭력 음란만화’를 청소년에게 대여해줬다는 이유로 만화방 업주가 대거 입건되고 총판업자들에 대해서는 구속영장까지 신청됐다. 신설된 청소년보호위원회는 유해만화 심의로 시중에 유통되는 만화 중 무려 1700종, 510만권이 청소년에 유해하다는 판정을 내렸다.
7월 21일 검찰이 이현세 작가를 음란문서 제조 혐의로 소환 조사하고 음란 폭력 만화를 실었다는 이유로 신문사 대표와 만화가를 대거 입건, 일부는 벌금형 약식기소하면서 만화 탄압은 절정에 달했다.
물론 유해매체를 단죄하겠다는 이러한 행위들은 청소년 보호와 아무런 관련도 없었다. 여기에 문민정부도 만화 산업 부흥을 위한 정책들을 이전부터 추진해왔던 점, 김대중 국민의정부가 들어선 이후 적극적인 사법 대응이 또 갑자기 중단된 점 등을 감안하면 당시 만화 심의 사태의 목적이 무엇이었는지 파악하기가 쉽지 않다.
이 시기 만화를 보고 자란 청소년들은 웹툰 시대의 작가가 됐고, 또 오래도록 만화의 소비자로 남아 한국은 손에 꼽을 정도로 만화라는 미디어를 많이 생산하고 소비하는 나라가 됐다. 만화가 경쟁력 있는 산업으로 자리잡은 현 상황을 생각하면, 유해물 낙인을 위한 30년전의 시도는 괴상한 집착으로만 기억되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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