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實錄조조] 소설 연재 안내
본 소설은 현 정세의 사건들을 조조, 유비, 손권 등의 인물과 탁류파, 청류파 등의 가상 정치 세력으로 치환하여 재구성한 팩션(Faction)물입니다.
서라, 짐짓 '대의를 앞세우나' 실은 사사로운 이익과 권력을 좇는 자들을 탁류파(濁流派)라 칭하고, 그 반대편에서 '청명한 정치를 부르짖으나' 실은 권문세족의 이해를 대변하는 자들을 청류파(淸流派)라 부르노라. 현재 탁류파는 여당인 민주당, 청류파는 야당인 국민의힘이니라.
조조(曹操)는 탁류파의 우두머리이자 대선을 통하여 대권을 잡은 당대 제일의 웅걸이었다. 탁류파의 정신적 지주로는 선대 제후인 유비(劉備, 문재인 전 대통령)가 있었고, 조조의 대적이자 청류파가 밀던 인물은 곧 강동의 호랑이라 불리던 손권(孫權, 윤석열 전 대통령)이었다.
중원 대륙이 미중(美中)의 거대한 파도와 북방 오랑캐(북한, 러시아)의 준엄한 위협 앞에 흔들리던 시절, 한서(韓瑞, 한반도)에는 두 가지 흐름이 대립하고 있었다. 하나는 정권 교체 이후에도 거대한 세력으로 남아 황하의 진흙탕 속에서 실리를 찾는 탁류파(濁流派, 민주당)였고, 다른 하나는 혼탁한 세상 속에서 청렴과 정통을 부르짖는 청류파(清流派, 국민의힘)였다.
청류파의 지지를 등에 업고 잠시 중원의 패권을 쥐었던 손권(孫權, 윤석열 전 대통령)은 동쪽 바다의 강성한 이웃, 왜국(倭國)과의 관계에서 '굴종외교'라는 비난을 받으며 지지기반을 잃었다.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아픔 을 외면하고, 심지어 독도 문제에 대해서도 애매한 태도를 취하며 , 청류의 명분마저 훼손했다.
이러한 손권의 실책 속에 난세의 간웅(奸雄)이라 불리는 조조(曹操, 이재명 대통령)가 중원의 주인으로 우뚝 섰다. 조조는 유비(劉備, 문재인 전 대통령)가 이끌던 탁류파의 기반을 계승했지만, 그 외교 노선은 더욱 치밀하고 실용적이었다. 그는 과거사 문제에서는 단호함을 잃지 않으면서도 , 경제와 안보라는 당면한 실리를 위해 전향적인 '투트랙 전략'을 천명했다.
조조는 취임 후 서쪽 오랑캐(미국)와의 회담에서 아무도 예상치 못한 핵추진 잠수함 도입이라는 '대담한 승부수'를 던져 , 병법가로서의 비범한 기량을 만천하에 과시했다. 이로써 조조는 한서의 안보를 '국방 주권'의 차원으로 끌어올리며 , 난세에 걸맞은 '똑똑한 협상가'로 자리매김했다.
조조가 패권을 굳힌 지 얼마 되지 않아, 동쪽 왜국에서는 새로운 총리 다카이치 사나에(高市早苗)가 등장했다. 그녀는 왜국의 병법서인 '태평양 참전기'의 정신을 계승하고, 과거사 문제에 대해서도 강경한 입장을 고수해온 '동해의 여장부'였다. 그녀의 등장에 한서의 여당인 탁류파 진영은 "왜국의 새로운 총리가 과거의 망령을 불러올 것"이라며 깊이 우려했다.
그러나 다카이치 총리는 취임 직후 뜻밖에도 '현실주의' 노선을 택하는 놀라운 변화를 보였다. 이는 북방의 위협(북·중·러의 협력 강화)이 날로 심각해지고 , 서쪽 오랑캐(미국)마저 '자국 제일주의'를 외치며 믿음직스럽지 못한 상황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다카이치는 이 엄중한 정세 속에서 안보와 경제의 실리를 얻기 위해서는 한서와의 협력이 필수적임을 깨달은 것이다.
“대저 난세에 이웃이 약해지면 잠시의 이익을 얻을 수 있으나, 위기가 닥치면 함께 무너질 수밖에 없다.”
이는 조조의 평소 지론이었다. 이에 조조와 다카이치 총리는 신라의 고도(古都)인 서라벌(경주)에서 열리는 '태평양 제후들의 모임(APEC)'을 계기로 전격적인 회담을 결정했다. 이 회담은 다카이치 총리 취임 불과 9일 만에 이루어진, 그야말로 군사적 긴급성을 띤 만남이었다.
관도대전과 같은 40분의 심리전
예정된 회담 시간은 20분에 불과했다. 이 짧은 시간 동안 두 지도자는 서로의 무장을 해제하고 신뢰를 구축해야 했다. 조조는 다카이치 총리를 맞이하며 격의 없는 미소를 보였다.
“총리께서 취임 후 '한서는 왜국에게 매우 중요한 이웃이며, 관계를 안정적으로 발전시키고 싶다'고 하셨던 말씀은 제가 평소에 하던 말과 글자 하나 다르지 않고 똑같습니다”.
조조는 먼저 국익을 위한 공통 인식의 일치성을 강조하며 다카이치 총리의 경계심을 허물었다. 이는 마치 조조가 관도대전에서 원소의 군량미를 태워 사기를 꺾듯, 외교적 논쟁의 불씨를 사전에 제거한 '심리전의 승리'와 같았다.
결국 회담은 예정 시간을 두 배나 넘긴 40여 분간 지속되었다. 이는 두 지도자가 이념적 외침을 멈추고 '흉금을 터놓고 이야기하며' 개인적 거리를 좁히고자 한 뚜렷한 외교적 신호였다.
회담을 마친 후 조조는 측근들에게 "매우 좋은 느낌을 받았고, 이전의 모든 걱정이 다 사라졌다"고 공개적으로 밝혔다.
과거사의 은유와 '리더십 관리'의 계책
이번 회담에서 가장 민감한 과거사 현안(강제동원, 독도)은 직접적으로 언급되지 않았다. 대신 조조는 역사 문제를 새로운 언어로 규정하여 관리하려는 전략을 택했다.
“한일은 앞마당을 공유하는 너무 가까운 사이이다 보니, 때로는 가족처럼 정서적으로 상처를 입기도 하는 것 같습니다”.
조조는 과거의 문제를 법적, 정치적 분쟁이 아닌 '가족 간의 정서적 상처'로 프레이밍함으로써, 첨예한 대립을 우회하는 놀라운 외교적 기량을 발휘했다. 다카이치 총리는 이 '감정적 은유'에 깊이 공감하며 , "이웃 나라이다 보니 입장이 다른 여러 현안이 있지만, 이를 리더십으로 관리할 것"이라고 화답했다.
이 '리더십 관리'는 양국 지도자가 과거사 갈등을 재점화하지 않고, 안보와 경제라는 상위 목표를 위해 잠정적으로 봉인하겠다는 암묵적인 동의였다. 마치 화살을 쏘지 않고도 적의 방어를 무력화하는 무언의 병법과 같았다.
나라현(奈良縣)으로 가는 셔틀 외교
회담에서 조조는 양국 지도자가 정기적으로 상호 방문하는 '셔틀 외교'를 적극적으로 실시하자고 합의했다. 다음 방문은 조조가 왜국을 찾아야 할 차례였다. 이때 조조는 또 하나의 '대담한 제안'을 던졌다.
“다음 회담 장소는 왜국의 도읍(도쿄)이 아닌, 총리의 고향인 나라현(奈良縣)으로 가시지요”.
나라현은 서라벌(경주)처럼 수천 년 전부터 한서와 왜국이 사람과 기술, 사상을 교류했던 깊은 인연의 땅이었다. 조조는 회담 장소를 정치적 수도의 압박에서 벗어나 상징적인 문화의 고향으로 옮기려 했다. 이는 양국 관계를 '정치적 현안'이 아닌 '지도자 개인 간의 신뢰'로 굳건히 다지려는 전략이었다. 다카이치 총리는 조조의 이 제안에 '흔쾌히 좋아했다'고 전해진다.
이러한 조조의 '지방 외교' 제안은 단순히 외교적 관례를 넘어, 향후 과거사 문제가 다시 불거졌을 때 개인적인 신뢰를 완충 장치로 사용하여 관계의 파국을 막으려는 치밀한 포석이었다. 실로 조조다운, 치밀함 속에 대담함이 숨겨진 '똑똑한 협상가'의 면모가 돋보이는 회담이었다.
탁류파의 실용과 청류파의 불안
회담이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자 탁류파 내부에서는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그들은 조조의 실용 외교가 탁류파의 가치를 드높였다고 자찬했다.
그러나 청류파의 잔존 세력은 불안감을 감추지 못했다. 그들은 조조가 과거사 문제를 '감정적 상처'라는 모호한 표현으로 은유하는 과정에서, 손권 정권이 이미 저질렀던 '굴종외교'의 그림자를 완전히 벗어던지지 못했다고 비판했다.
“조조가 아무리 난세의 영웅이라 한들, 그 실리(實利)의 겉옷 속에 숨겨진 것은 유비(문재인)와 손권(윤석열) 정권의 무거운 과거사 짐이 아니던가?”
하지만 북방의 위협이 커질수록, 한서가 조조의 '현실주의'와 다카이치의 '실용주의'가 만들어낸 외교적 안정화 궤도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는 것 역시 피할 수 없는 현실이었다. 조조의 시대는 이제 막 시작되었으며, 과거의 상처를 봉인하고 미래의 실리를 추구하는 그의 치세는 동북아의 격변 속에 깊숙이 뿌리내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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