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컬처 이준섭 기자] 경주에서 열린 APEC 정상회의의 화두 중 하나는 ‘문화창조산업’이었다.
지난 1일 이재명 대통령 주재로 열린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 '리트리트(Retreat)' 세션에서 회원 정상들은 'APEC 정상 경주선언'과 'APEC AI 이니셔티브', 'APEC 인구구조 변화 대응 공동 프레임워크' 등 총 3건의 문서를 채택했다. 특히, 문화창조산업을 아·태 지역의 신성장동력으로 인정하고 협력 필요성을 명문화해 눈길을 끌었다.
AI와 인구구조 변화에 대응할 새로운 성장동력으로 문화를 제시한 것은 흥미롭고도 상징적인 일이다. 그러나 경주선언을 통해 표면적으로는 한국 문화 콘텐츠의 글로벌 확산과 K-컬처의 위상이 국제적 성공 사례로 부각되었지만, 실질적 경제 성과로 이어지기 위해서는 보다 정밀한 정책 설계가 필요하다.
문제의 핵심은 산업 구조의 불균형이다. 창작과 제작, 유통과 소비가 단순히 연결된 형태가 아니라 분절되어 있고, 대부분의 수익은 대형 플랫폼과 스타 IP에 집중되는 구조다. 중소 제작사와 인디 창작자의 지속 가능성은 여전히 불투명하다.
경주선언은 문화산업을 경제적 신성장동력으로 인정하고 협력 필요성을 명시한 점에서 의미가 크다. 그러나 정책적 세부 계획과 재원 배분, 법·제도적 뒷받침 없이 선언만으로 성과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문화콘텐츠 수출의 양적 확대보다 질적 경쟁력 확보와 생태계의 안정적 성장 구조가 더 긴급하다.
또한, APEC을 통한 국제 협력은 기회이자 도전이다. 문화 교류와 공동 프로젝트 추진은 한국 콘텐츠의 글로벌 시장 진출을 촉진할 수 있지만, 각국의 규제와 산업 정책 차이를 고려한 맞춤형 전략 없이는 기대만큼의 경제적 효과를 거두기 어렵다. 단순히 ‘K컬처 확산’이라는 이미지 마케팅에 머무를 경우, 장기적 산업 경쟁력에는 한계가 있다.
정부는 이번 선언을 계기로 AI·디지털 기술과의 융합, 데이터 기반 콘텐츠 개발, 글로벌 IP 관리 전략 등 체계적 접근을 병행해야 한다. 기술을 활용한 제작 효율화와 글로벌 유통 네트워크 강화는 단기적 수익성을 높이는 동시에, 장기적 성장 기반을 마련할 수 있는 핵심 수단이다.
문화산업 정책에서 놓치기 쉬운 부분은 노동과 인력의 지속 가능성이다. 창작자의 권익 보호, 안정적 수익 구조, 교육과 전문인력 양성은 산업 경쟁력과 직결된다. 특히, 일부 스타 중심의 산업 구조는 단기적 홍보 효과는 높일 수 있지만, 지속 가능한 생태계 구축에는 한계가 있다. 정부와 민간이 공동으로 장기적 투자 전략을 세우고, 소규모 제작사까지 포함한 생태계 지원이 필수적이다.
재정 지원과 세제 혜택, 민간 투자 유인책 등 정책 도구도 종합적으로 검토되어야 한다. 일회성 지원이나 이벤트 중심의 마케팅은 산업의 질적 성장에 제한적 영향을 줄 뿐이다. 문화산업을 경제적 신성장동력으로 자리매김하려면, 안정적 인프라 구축과 민간·공공의 협력 모델이 필수적이다.
하지만 한국은 여전히 IP 관리, 저작권 보호, 글로벌 플랫폼 전략에서 뒤처져 있다. 경주선언이 선언적 의미를 넘어 실질적 경쟁력 강화로 이어지려면, 산업 구조, 정책 인프라, 글로벌 협력 전략을 통합적으로 재검토해야 한다.
경주선언이 담고 있는 문화산업 신성장동력은 선언만으로 달성될 수 없다. 산업의 구조적 문제를 해결하고, 정책과 투자가 일관된 전략으로 연결될 때, K컬처는 인기 콘텐츠를 넘어 국가 경제 성장의 핵심 축으로 자리잡을 수 있다. 선언의 의미를 현실화하는 것이 이제 한국 문화산업의 진정한 과제다.
국내 문화산업이 글로벌 경제 무대에서 지속가능한 경쟁력을 확보하려면, 정책적 비전과 실천이 동시에 작동해야 한다. 경주선언은 시작일 뿐, 이를 실행 가능한 전략과 구조적 개혁으로 연결시키는 것이 향후 산업의 성패를 결정할 것이다.
결국 중요한 것은 선언 이후다. 실행 없는 비전은 공허한 수사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뉴스컬처 이준섭 rhees@nc.p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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