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英왕실, 생존 위해 어쩔 수 없이 앤드루 '손절'"
군주제 찬성 86→51%, 젊은 세대 '원수 선출제' 선호
(런던=연합뉴스) 김지연 특파원 = 찰스 3세 영국 국왕의 동생인 앤드루(65)가 성추문 끝에 왕자 지위를 박탈당하면서 영국 왕실의 존폐 논란이 다시 불붙었다.
버킹엄궁은 지난달 30일(현지시간) 왕자를 포함한 앤드루의 모든 칭호와 훈작을 박탈하기 위한 공식 절차를 시작했으며 왕실 거주지에서도 퇴거 조치했다고 발표했다.
그러면서 "국왕과 왕비는 이제까지, 그리고 앞으로도 모든 종류의 학대 피해자들을 생각하고 매우 깊이 위로한다는 점을 분명히 하고자 한다"고 강조했다.
고(故)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차남인 앤드루는 미국의 억만장자 미성년자 성착취범 제프리 엡스타인에 고용된 버지니아 주프레가 17세일 때 강제로 성관계를 맺었다는 의혹을 받아 왔다.
그는 2022년 주프레가 낸 민사소송에서 합의했지만, 책임을 인정하지는 않았고 의혹을 부인해왔다. 유죄가 확정되지 않았으나 왕실은 '손절'을 택한 셈이다.
오랜 세월 왕족을 둘러싼 스캔들이나 여론에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던 영국 왕실이 왕자의 모든 지위를 박탈하고 피해자를 공개적으로 위로한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다.
엘리자베스 2세는 대외적으로 가정사를 논의하지 않고 외부인이 왕족을 비판하도록 부추기지 않는다는 기조를 확고하게 유지했다. 1997년 찰스 3세의 전처 다이애나 왕세자빈이 사망했을 때 버킹엄궁에 조기 게양을 허용하지 않고 침묵을 지키다가 대중의 분노가 폭발 수준에 이르렀을 때야 추모 연설을 했을 정도다.
앤드루에 대한 버킹엄궁의 '단호한' 대응은 왕실이 존폐의 위기 앞에 서면서 어쩔 수 없이 한 선택으로 여겨지고 있다.
일간 텔레그래프는 31일 "대중 정서에 공감하는 이런 대응은 충격적일 만큼 왕실답지 않은 반응이었다"며 "생존하려는 절박함이 동력이었다. 왕실에는 존폐의 순간이 될 수 있었다"고 분석했다.
앤드루가 요크 공작을 포함한 모든 훈작을 포기하겠다고 선언하고 버킹엄궁이 왕자 칭호와 왕실 거주지까지 박탈하기로 한 지난 며칠간 영국 주요 방송 황금시간대에는 군주제 폐지를 주제로 한 공개 토론이 벌어졌다. 이는 1997년 다이애나빈 사망 이후 보지 못했던 강도라고 이 매체는 짚었다.
지난달 27일 찰스 3세가 한 성당을 방문했을 때 한 시위자가 찰스 3세를 향해 "앤드루와 엡스타인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었나. 일을 묻어달라고 경찰에 요청했나"라고 따져 묻는 일도 있었다.
군주제 폐지를 주장하는 단체 리퍼블릭의 그레이엄 스미스 대표는 이런 시위를 지지한다면서 "정치인들이 제대로 일하지 않고 경찰도 수사하지 않는다면 대중은 점점 더 답하기 어려운 질문을 던지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영국에서 군주제에 대한 여론은 하락세를 보이고 있다.
정례적으로 실시되는 영국 사회 태도 조사에서 '영국에 군주제가 얼마나 중요한가'라는 문항에 긍정적으로 답한 비율은 1983년 86%에서 2024년 51%까지 떨어졌다. 군주제를 폐지해야 한다는 응답률은 같은 기간 3%에서 5배인 15%로 높아졌다. 특히 16∼34세 젊은 세대의 59%는 국가원수 선출제를 선호한다고 했다.
왕실 전문 작가 로버트 잡슨은 "이번 스캔들은 (왕실에) 선례를 남겼고 모든 걸 바꿔놨다"며 "앤드루는 잘못이 법정에서 입증되지 않았는데도 작위를 잃고 쫓겨났다"고 지적했다.
찰스 3세와 윌리엄 왕세자가 중요한 건 법원이 아니라 여론임을 받아들였다는 것이다.
이번 '손절'로 영국 왕실이 혼란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 관측은 엇갈린다.
키어 스타머 총리는 31일 낸 성명에서 국왕의 결정을 전적으로 지지한다면서도 앤드루의 왕위 계승 서열(8위)에서 제외하는 법안을 추진할 계획은 없다고 밝혔다.
그러나 집권 노동당의 존 트리켓 의원은 앤드루를 왕위 계승 서열에서 완전히 제외해야 한다고 말했다.레이철 매스컬 의원도 "왕실이 여론뿐 아니라 모든 측면에서 (잘못에) 책임을 지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미국 하원 감독위원회의 민주당 의원 최소 4명이 앤드루가 출석해 증언해야 한다고 요구하고 있다고 BBC 방송은 전했다.
앤드루 전기를 쓴 왕실 작가 나이절 코손은 "진짜 위험은 이런 문제들이 의회에서 논의되기 시작했다는 것"이라며 "전통적으로 의회는 왕실 문제를 내버려 뒀지만, 건드리는 방향으로 계속 간다면 어디까지 갈지 누가 알겠느냐"고 반문했다.
cherora@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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