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뉴스투데이 김진영 기자] 한미 정상회담을 계기로 관세협상이 극적으로 타결됐지만, 반도체는 여전히 ‘숙제’로 남았다. AI 슈퍼사이클이 본격화하며 삼성전자·SK하이닉스가 연이어 최대 실적을 갈아치우는 상황에서 정작 관세 세율과 적용 품목, 원산지 판정 기준은 문서에 고정되지 않았다. 핵심 반도체 품목의 향후 관세가 외교·정치 변수를 타고 좌우될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미국과 한국의 해석 차는 이미 공표 단계에서 드러났다. 하워드 러트닉 미국 상무장관은 30일 엑스(X·옛 트위터)를 통해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과 이재명 대통령의 회담에서 이뤄진 무역 합의를 소개, “반도체 관세는 이번 합의의 일부가 아니다”라며 “한국이 시장 100% 완전 개방에 동의했다”고 발표했다.
반면 대통령실 “대만보다 불리하지 않은 수준으로 적용받기로 했다”며 “미국의 표현은 자국 홍보를 위한 수사적 발언”이라고 불확실성 제거를 강조했다. 그러나 업계에서는 이런 메시지 괴리가 남긴 위험을 직시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불확실성의 가장 큰 원천은 대만이다. 미·대만 간 반도체 관세 협상이 아직 마무리되지 않은 가운데 대만이 확보할 조건에 따라 한국의 적용 기준이 연동될 가능성이 높다. 일본처럼 최혜국 대우(MFN)가 명문화된 것도 아니기에 이번 합의가 향후 법적 구속력을 갖춘 기준으로 이어질지 장담하기 어렵다는 우려가 제기된다.
특히 고대역폭 메모리(HBM), 고용량 DDR5, 서버 SSD 등 AI 인프라 핵심 품목은 기존 범용 메모리와 구조가 달라 관세 적용 범위를 어떻게 규정할지가 중요하다. HBM의 경우 국내 패키징·테스트 공정 비중이 확대되는 만큼, 가치기여율 산정 방식에 따라 원산지 판정과 관세율 결과가 달라질 수 있다. 세율 그 자체보다 ‘무엇에 적용되느냐’가 수조 원의 마진과 장기공급계약(LTA) 가격 재조정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분석이다.
슈퍼사이클이 막 시작된 시점에 정책 리스크가 불거지고 있다. 삼성전자는 3분기 영업이익 12조1661억원 중 DS부문이 7조원을 기록하며 HBM3E·서버 SSD 판매가 상승을 이끌었다. SK하이닉스도 영업이익 11조3834억원으로 창사 이래 최고치를 달성했다. 양사 모두 내년 HBM 공급이 이미 확보된 만큼 호황 지속이 예상되지만, 관세 불확실성이 투자·가격 전략의 변수로 남아 있다.
엔비디아와의 공급 연계가 커질수록 미국 정책 변수의 영향력도 커지고 있다. SK하이닉스는 내년 HBM4 공급을 확정했고, 삼성전자 역시 HBM3E 양산을 확대하며 엔비디아 AI 인프라의 핵심 공급망으로 자리 잡았다. 그러나 미국의 대중 기술 견제, 수출 규제와 관세 논의가 맞물리며 미국 정책 방향 전환이 관세 기준 명문화 지연과 협상력 약화로까지 이어질 수 있다는 평가이다.
이런 가운데 미·중 기술 패권 경쟁도 관세 리스크를 더 크게 만들고 있다. 미국이 엔비디아 AI 가속기 공급을 정책 변수로 통제하고 있는 만큼, 한국 반도체의 대미 수출 관세 협상 역시 지정학 환경에 따라 영향받을 수 있다는 지적이다. 관세가 단순 통상이 아니라 전략산업 카드가 되는 국면에서 K반도체의 ‘협상력 창구’가 더 중요해지고 있다.
관세 기준의 명문화 필요성도 커지고 있다. 한 메모리 업계 관계자는 “정부 발표를 신뢰하지만, HS코드 지정·원산지 판정 기준이 명확해지지 않으면 대만 협상 결과에 따라 적용 조건이 달라질 수 있다”며 “LTA 가격 조항과 미국 내 투자 계획에도 영향이 있어 협상 추이를 면밀히 보며 전략을 조정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슈퍼사이클 구간에서는 불확실성 자체가 비용이기 때문에 조기 확약이 산업 경쟁력”이라고 강조했다.
정치권에서는 김도읍 정책위의장이 “반도체 관세를 두고 양국 발표가 엇갈리고 있다”며 “투자 회수 구조, 수익 배분 방식 등 핵심 내용이 빠져 있다”고 경고했다. 김건 의원도 “지난 7월처럼 발표 내용이 달라 혼란이 반복되고 있다”며 “반도체 관세·시장개방 조건을 문서로 투명하게 증명해야 한다”고 밝혔다. 송언석 원내대표는 “섣부른 성과 홍보는 위험하다”며 “최종 문서 확정 전까지 긴장을 늦추지 말아야 한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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