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종대왕
세종대왕 — 기후와 농업을 과학으로 다스린 조선의 환경개혁가
세종은 기후변화 대응의 가장 대표적 왕이다. 태종대의 기반 위에서 농업, 기상, 수리 체계를 국가 차원으로 정비했다
농사직설(1429) 편찬을 통해 지역별 기후와 토양에 맞는 농법을 표준화했다.천문기구 앙부일구, 강우량 측정기 측우기, 바람 방향을 기록한 풍기대 등을 만들어 기후 관측과 예보의 제도화를 이뤘다.
전국의 저수지, 제방, 수로를 정비해 홍수와 가뭄을 동시에 대비하는 수리 체계를 구축했다.한랭기(소빙하기)로 인한 냉해가 잦던 시기였음에도, 벼 품종의 남북 분화 재배를 장려해 기후 적응형 농업 정책을 시행했다.
그 결과, 태종 말기 약 80만 결이던 농지가 세종대 후반에는 약 160만 결 이상으로 확대되었다. 세종의 시대는 기후 불안 속에서도 ‘풍년의 주기’를 회복한 시대였다.
성종 — 산림과 하천 관리의 제도화를 이끈 조선의 환경 행정가
성종(재위 1469~1494)은 도시화와 농지 확장으로 인해 심화된 산림 훼손 문제를 인식한 첫 번째 군주였다.산림을 백성의 숨결로 규정하고, 무분별한 벌목과 화전을 금지했다.
하천 정비와 수리시설 복구를 지방 수령의 주요 책임으로 삼았다.농사와 어업의 균형을 중시하며, 해안 홍수 방지용 둑과 간척 사업을 장려했다.
성종의 산림 정책은 이후 18세기 영조·정조 시대의 도시 기후 완화책으로 이어졌다.
영조 — 기후 재난을 정치 개혁의 기회로 만든 왕
영조(재위 1724~1776) 시대는 기후의 불안정이 극심했다. 냉해, 홍수, 대기근이 연이어 발생했지만, 영조는 이를 단순한 자연재해가 아니라 행정개혁의 기회로 삼았다.“하늘은 변하지만, 사람의 대비는 더 변해야 한다”며 기민구휼청을 설치해 국가 차원의 식량 배급 시스템을 가동했다.
준천사업을 추진해 청계천을 정비하고, 도심의 침수 문제를 해결했다.쌀값 폭등에 대응하기 위해 상평통보 유통을 활성화하고, 창고형 비축 시스템을 구축했다.
영조의 치세는 기후와 경제가 서로 긴밀히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준 시기였다. 그는 ‘기후 대응’을 경제와 사회 개혁의 촉진제로 사용했다.
정조 — 도시 설계로 기후에 대응한 조선의 녹색건축가
정조(재위 1776~1800)는 기후와 인간, 산업을 통합적으로 바라본 통치자였다.수원화성 건설 과정에서 자연과 인공의 조화를 설계 원칙으로 삼았다. 바람길, 수로, 산림을 모두 도시 구조에 반영했다.
수원 지역의 논과 밭을 통합 관리하여 농업과 상업이 결합된 복합 도시 모델을 구현했다.도성 내부의 열섬 현상을 완화하기 위해 도시 숲 조성을 명령하고, 창덕궁 후원을 확장했다.
정조의 수원화성은 ‘산업, 생태, 인간’을 동시에 고려한 18세기형 기후 적응도시 모델로 평가된다.
철종 — 기근과 가뭄의 시대, 마지막 농정의 몸부림
철종(재위 1849~1863) 시기 조선은 한랭기와 연속 가뭄으로 심각한 식량난을 겪었다. 철종은 직접 농민의 삶을 파악하며 실질적 구휼정책을 시도했다.도성 외곽에 공공 방죽과 저수지를 복구하고, 구황곡을 저장했다.중앙에서 지방으로의 식량 분배를 명문화한 최초의 문서화 지침을 내렸다.기근 속에서도 세금 감면과 강제 부역 완화를 시행해 ‘기후 재난 시대의 인간 중심 행정’을 남겼다.
하늘의 뜻을 읽은 사람들
조선의 왕들은 하늘을 두려워하면서도, 그 뜻을 인간의 손으로 해석하려 했다.
세종의 농사직설은 과학의 이름으로 하늘을 분석했고, 영조의 준천사업은 정치의 이름으로 물길을 다스렸으며, 정조의 화성은 인간의 이름으로 바람길을 설계했다.
오늘날의 기후 위기 시대에 조선의 역사는 묻는다.
그들은 하늘 탓을 멈췄다. 그렇다면 우리는, 지금 무엇을 탓하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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