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實錄조조] 소설 연재 안내
본 소설은 현 정세의 사건들을 조조, 유비, 손권 등의 인물과 탁류파, 청류파 등의 가상 정치 세력으로 치환하여 재구성한 팩션(Faction)물입니다.
서라, 짐짓 '대의를 앞세우나' 실은 사사로운 이익과 권력을 좇는 자들을 탁류파(濁流派)라 칭하고, 그 반대편에서 '청명한 정치를 부르짖으나' 실은 권문세족의 이해를 대변하는 자들을 청류파(淸流派)라 부르노라. 현재 탁류파는 여당인 민주당, 청류파는 야당인 국민의힘이니라.
조조(曹操)는 탁류파의 우두머리이자 대선을 통하여 대권을 잡은 당대 제일의 웅걸이었다. 탁류파의 정신적 지주로는 선대 제후인 유비(劉備, 문재인 전 대통령)가 있었고, 조조의 대적이자 청류파가 밀던 인물은 곧 강동의 호랑이라 불리던 손권(孫權, 윤석열 전 대통령)이었다.
후한(後漢) 말기, 천하의 중앙 권위는 이미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명분과 제도로 지탱되던 400년 한나라의 기강은 극심한 사회적 분열과 이념 갈등, 그리고 해소되지 않는 경제적 불평등이라는 황건적의 난(黃巾賊의 亂)에 의해 뿌리째 흔들렸다. 전통적인 질서와 도덕적 명분을 강조하던 야당인 청류파(淸流派, 국민의힘)는 조정 내에서 높은 학식과 고결한 가치를 내세웠으나, 정작 백성들의 깊은 고통과 만연한 구조적 문제(극심한 경제적 불평등과 서민의 고통)에는 무력했다. 민심은 기득권과 도덕적 순수성에 집착하는 기존 시스템에 대한 신뢰를 잃었고, 이 기능 부전의 틈을 비집고 새로운 형태의 지도자가 출현할 수밖에 없는 구조적 필연성이 대두되었다.
혼탁한 시대에 순수한 이상만으로는 천하를 구할 수 없다는 인식이 퍼지자, 기존 질서의 논리나 도덕률에 얽매이지 않고 오직 ‘결과’와 ‘실행’을 중시하는 정치 세력, 곧 여당인 탁류파(濁流派, 민주당)가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청류파가 제도적 순수성을 지키는 데 몰두하는 동안, 현실의 절박한 요구는 빠르고 단호한 처방을 원했다. 바로 이때, 천하의 시선은 한 미천한 가문 출신이지만 비범한 재능과 기민함을 겸비한 조조(曹操, 이재명)에게 쏠렸다. 그는 기존 정치권이 해결하지 못한 민생 문제를 정면으로 돌파하는 정책들을 선보였다.
조조, 난세를 논하다: 실용주의의 깃발
조조의 초기 등장은 혁신적이었으며, 이는 당대의 청류파에게는 충격이자 위협이었다. 그는 기존의 중앙정부가 외면했던 지방자치단체에서 실험적인 정책들을 과감하게 추진했다. 지역 화폐 발행이나 기본 소득 구상 등은 전통적인 경제 질서와 재정 건전성을 중시하는 청류파의 관점에서 볼 때는 난세의 질서를 해치는 포퓰리즘적 행태이자 기득권에 대한 위험한 도전이었다.이러한 배경 속에서 조조는 당대 최고의 인물 평론가였던 허소(許劭)에게 "치세의 능신(能臣), 난세의 간웅(奸雄)"이라는 논쟁적인 평가를 받게 된다. 탁류파는 그를 난세의 상황을 타개할 유일한 혁신가이자 대중의 구원자로 보았으며, 그의 단호한 실행력과 대중 복지 우선 정책에 열광했다. 반면, 청류파는 그를 법적 논란과 도덕적 흠결을 지닌, 권모술수에 능한 위험한 인물로 규정하며 끊임없이 비판했다. 이처럼 조조의 인물됨이 양극단으로 평가받는 것은 그의 정치적 성격이 그만큼 입체적이고 논쟁적임을 보여준다.
조조는 이러한 비판에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실용주의적 정치 철학을 공공연히 피력했다. 그는 난세를 수습하기 위해서는 전통적 도덕률보다 실질적인 통치 역량이 우선되어야 함을 역설했다. 비록 후일 그가 천하를 호령하는 과정에서 드러나는 오만과 독선은 많은 비판을 낳았지만, 그의 초기 행보는 분명 기존의 낡은 체제를 전복하고 새로운 질서를 모색하려는 탁류의 혁신적 기치를 상징했다.
義託과 聯合, 劉備의 影子
조조가 탁류파의 새로운 지도자로 부상하는 과정은 복잡한 당내 역학관계를 내포한다. 유비(劉備, 문재인 전 대통령)는 탁류파의 오랜 정신적 구심점이자 ‘인(仁)’을 상징하는 인물로, 그가 추구했던 도덕적 정통성은 당원들에게 여전히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조조는 자신의 권력을 공고히 하고 청류파의 공격을 방어하기 위해 유비가 남긴 정치적 유산과 지지층을 계승해야만 하는 숙명을 가졌다.
유비의 힘이 도덕적 정통성(仁)에 있었다면, 조조의 힘은 오직 강력한 실행력과 실용주의적 통치 능력(才)에 있었다. 조조가 유비의 명분(정치적 계승)을 흡수하려 노력했음에도 불구하고, 조조의 공격적이고 때로는 급진적인 정치 스타일은 유비의 온건한 지지층이나 당내 비주류 세력에게 필연적으로 마찰과 반발의 명분을 제공했다. 이러한 당내의 갈등은 조조가 천하 통일(당 장악 및 대권 확보)을 이루기 위해 반드시 유비의 ‘그림자’를 완전히 벗어나거나, 혹은 그 그림자를 자신의 실용주의 틀 안에 완전히 포용해야 하는 장기적인 숙제로 작용한다. 조조에게 유비의 존재는 양날의 검과 같았다. 없어서는 안 될 정통성의 방패였으나, 동시에 조조의 급진성을 제약하는 도덕적 족쇄이기도 했던 것이다. 이러한 계승의 정치적 부담은 조조가 권력을 행사할 때마다 내부의 균열을 불러일으키는 원인이 되었다.
동탁 토벌군 결성 및 서주 대학살의 비유
난세의 혼란 속에서 정치적 위기나 대형 선거를 앞두고 각기 다른 세력들이 일시적으로 모이는 범여권/범야권 연합은 동탁 토벌군 결성 상황에 비유된다. 동탁(현실 정치의 부정부패 혹은 극단적 혼란)을 타도한다는 공동의 목표 아래 모였으나, 각 제후들은 사사로운 이해관계와 패권 다툼으로 인해 진정으로 힘을 합치지 못했다. 이는 현대 정치에서도 특정 목표를 위한 연합이 얼마나 허점 많고 일시적인 성격인지를 보여준다.
더욱이 조조의 초기 통치 행보는 서주 대학살의 일화와 겹쳐지며 '간웅'으로서의 이미지를 강화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된다. 서주 대학살은 조조가 아버지의 복수를 명분으로 과도하고 잔인한 보복 행위를 벌여 수많은 무고한 백성을 희생시킨 사건이었다. 현대 정치에서 이는 조조(이재명)가 목표 달성(정책 실행 또는 비판 세력 제압)을 위해 법적, 도덕적 논란을 무릅쓰고 과도한 정책 집행이나 행정 결정을 강행했을 때, 대중으로부터 받는 격렬한 도덕적 비판과 심판의 상황에 비유된다. 이러한 사건들은 조조가 난세를 평정할 수 있는 '능신'일지는 몰라도, 전통적 가치와 도덕성을 중시하는 청류파의 관점에서는 용납할 수 없는 '간웅'임을 확정 짓는 역할을 했다.
中原의 覇權 爭奪, 官渡大戰의 재현
원소와 대결: 청류 전통과 탁류의 혁신
조조가 중원의 패권을 확립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관도대전(官渡大戰)은 현대 정치에서 조조(이재명)가 청류파의 전통적 기반과 명분을 대변하는 원소(袁紹, 이전 보수 주류 세력)를 상대로 전략적 승리를 거두는 일련의 주요 선거와 정치적 대결에 비유된다. 원소 세력은 사대부들의 지지와 압도적인 인적, 물적 자원(전통적 지지층, 대형 언론의 우위 등)이라는 압도적인 물량적 우위를 가졌었다. 이는 전통적 지지 기반이 탄탄하고 도덕적 명분이 우위에 있다고 자부하던 보수 주류의 모습을 상징한다.
그러나 이 대결에서 조조가 승리할 수 있었던 근본적인 이유는 난세에서 전통적 질서나 도덕적 명분보다는 전략적 유연성과 혁신적 실행력이 우위에 있음을 증명했기 때문이다. 원소는 자신의 압도적인 힘만 믿고 전략적 실책을 범했다. 이러한 청류파의 패배는 현대 정치에서 전통적 보수층이 시대 변화, 특히 새로운 미디어 환경과 대중의 포퓰리즘적 요구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하고, 오직 과거의 영광과 도덕적 자본에만 의존했을 때 맞이하게 되는 결과를 상징한다. 도덕적 자본은 난세를 수습하는 데 필요한 혁신적 속도와 실용주의 앞에서 얼마나 취약해질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역사적 교훈이다.
오소와 허유: 전략적 핵심과 배신자의 역할
관도대전의 승패를 가른 결정적인 순간은 원소군의 보급로였던 오소(烏巢) 기습이었다. 오소는 원소 세력이 의존하는 '보급로' 즉, 전통 언론의 우위나 고정 지지층의 단단한 결집력을 상징한다. 조조는 이 보급로를 기습적으로 무력화함으로써 원소의 기반을 흔들었다. 이는 조조 진영이 혁신적인 미디어 전략이나 대중의 아젠다를 선점하는 방식으로 청류파의 전통적인 정보 및 여론 통로를 무력화시키는 전략적 성공에 비유될 수 있다.
또한, 원소 진영의 핵심 인재였던 허유(許攸)의 조조 진영으로의 투항은 정치적 이합집산의 중요성을 부각시킨다. 허유는 청류파 내부의 핵심 인재였거나, 혹은 그들의 치명적인 약점과 정보를 제공할 수 있는 내부 정보원 역할을 했을 것이다. 그의 투항은 조조에게 결정적인 전략 정보를 제공하여 관도대전의 승패를 완전히 뒤집는 계기가 되었다. 이는 현대 정치에서도 내부 균열과 핵심 인물의 이탈이 전체 판세에 미치는 영향이 얼마나 막대한지를 보여준다. 조조는 오로지 재능을 기준으로 인재를 등용하는 '유재시거(唯才是擧)'의 원칙을 통해, 명분에 얽매이는 청류파의 한계를 철저히 파고들어 중원의 패권을 장악할 수 있었다.
江東의 淸流, 孫權의 도전과 赤壁의 敗北
청류의 새로운 희망: 손권(윤석열)의 등장
조조가 원소를 꺾고 중원을 통일했으나, 그의 패업은 강동(江東)에서 새로운 도전에 직면한다. 손권(孫權, 윤석열 전 대통령)의 등장은 전통적인 청류파였던 원소 세력과는 궤를 달리하는, 새로운 형태의 청류파를 상징한다. 손권은 중앙 정치권과는 거리가 먼 비정치권 출신으로서, 법치와 정의라는 강력한 기치를 내세워 조조의 '간웅' 이미지에 정면으로 도전했다.
손권 세력은 기존의 명분과 전통적 질서를 보존하려는 원소의 무력한 청류와는 다르게, 강력한 행정력과 지역 기반을 바탕으로 법치주의적 견제를 가했다. 조조가 중원 통일의 길목에서 이 새로운 청류의 도전에 직면했다는 것은, 조조의 실용주의적 통치가 법치주의라는 근본적인 제도적 장벽에 부딪히기 시작했음을 의미한다.
적벽의 교훈: 통합의 오만과 통치 위기
적벽대전(赤壁大戰)은 조조에게 있어 단순한 군사적 패배가 아니었다. 그것은 그의 절대적 실용주의와 통제 능력에 대한 오만이 낳은 결정적인 통치 위기였다. 조조는 압도적인 군사력과 중원을 평정한 경험을 바탕으로, 강동의 지리적, 문화적 특성(남방의 환경)이나 지역 주민들의 정서(여론)를 충분히 고려하지 않고 자신의 정책(군사력과 통제 시스템)을 획일적으로 강행하려 했다.
이러한 상황은 배들을 쇠사슬로 묶어 거대한 플랫폼을 만들었던 '연환계(連環計)'에 비유된다. 조조의 정책이 다양한 국민적 정서나 법적/문화적 특수성을 무시하고 북방의 통치 방식처럼 강행될 때, 이는 일시적으로는 강력한 통합 효과를 가져오는 듯 보이지만, 환경적 변화나 위기가 닥쳤을 때 오히려 전체 시스템을 한 번에 좌초시키는 취약성을 노출하게 된다.
결국 조조의 패배는 통제 불가능한 자연적 요소, 즉 '동남풍(東南風)'에 의해 완성되었다. 동남풍은 조조가 예측하지 못한 외부 변수, 예를 들어 여론의 급격한 전환, 대규모 스캔들, 혹은 사법적 판단의 돌발적인 영향력을 상징한다. 조조는 군사력과 실용주의라는 물리적 힘을 절대적으로 신뢰했지만, 통제할 수 없는 민심의 흐름이나 법치, 도덕이라는 '인문학적' 환경 요소를 무시하면서 패배를 자초했다. 이처럼 뛰어난 실행력을 가진 지도자라도 통제할 수 없는 환경적 요소를 무시할 경우 필연적으로 통치 위기를 겪게 된다. 혁신적 속도를 중시하는 절대적 실용주의가 때로는 전통적 안정성(청류의 법적 명분)에 의해 제동이 걸리는 역설적 상황을 초래한 것이다.
白馬를 타고 天下를 호령하다
인재술: 곽가의 혜안과 충성심
적벽에서 치명적인 패배를 겪은 후에도 조조는 좌절하지 않았다. 그는 탁류파 내부에서 자신의 지도력을 재정비하고 공고히 하는 데 집중했다. 조조의 힘은 오직 재능만을 보는 파격적인 인재 경영술, 즉 唯才是擧에 있었다. 그는 곽가(郭嘉)와 같은 혜안을 지닌 참모들을 중용했으며, 이들은 조조의 실용주의적 노선을 설계하고 실행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현대적으로 이는 조조(이재명)의 핵심 정책 설계자들과 강성 지지층의 역할을 분담하는 참모진들의 충성심과 뛰어난 능력을 비유한다.
그러나 조조의 인재 등용 방식은 빛과 그림자를 동시에 가진다. 능력만을 중시하는 그의 방식은 당면한 문제를 해결하는 데는 탁월했지만, 동시에 리더십에 대한 비판적 견해가 설 자리를 잃게 만드는 단점을 내포했다. 조조 주변에는 그의 정책에 쓴소리를 하거나 도덕적 정당성을 의심하는 목소리가 점차 사라졌고, 이는 장기적으로 권력의 독선화를 초래할 수 있는 위험을 내포하게 되었다.
위무제(魏武帝)의 야망은
한(漢)을 위(魏)로 바꾸다
조조의 통치 기반은 강력한 실용주의 정책의 성공에서 비롯되었다. 둔전제(屯田制)와 같은 경제 안정화 정책은 난세에 지친 백성들에게 환영받았고, 이는 조조의 통치 정당성을 확보하는 중요한 수단이 되었다. 그러나 청류파에게 이 모든 성공적인 정책은 결국 중앙 권력 찬탈의 야심으로 비판받는 빌미가 되었다.
조조는 유비(문재인)의 유산인 '한나라'를 형식적으로는 계승하는 모습을 취하면서도, 실질적으로는 당의 정체성과 정책 노선을 '위나라(魏)'의 색깔로 완전히 재편하는 과정을 거쳤다. 이 과정은 탁류파 내부의 정체성이 유비의 온건한 '인(仁)'의 명분에서 조조의 급진적 '실용(實用)'의 논리로 완전히 전환되었음을 의미한다.
여기서 조조가 마주한 가장 큰 딜레마는 바로 실용주의자의 법적/도덕적 덫이었다. 조조는 사실상 한나라 황제(헌제)를 끼고 천하를 통치했지만, 결국 생전에 선양(禪讓)을 통해 직접 황위에 오르지 못하고 위왕(魏王)으로 남았다. 이는 그가 아무리 강력한 실질 권력(위왕)을 가졌더라도, 도덕적이고 법적인 정통성(漢)의 상징을 완전히 무시하고는 완전한 합법성을 얻을 수 없음을 보여준다. 조조(이재명) 역시 끊임없이 제기되는 법적/도덕적 논란에 직면하며, 이 논란은 그가 완전한 '합법적 권위'를 확보하는 데 영원히 장애물로 작용하는 근본적인 약점으로 남는다.
화타의 죽음: 권력의 대가
조조의 생애 후반부를 상징하는 비극적인 사건 중 하나는 명의 화타(華佗)를 죽인 일화이다. 조조는 만성적인 두통(권력 유지의 압박과 법적 리스크)을 고치려 했으나, 화타가 제시한 근본적인 처방(수술)을 자신의 안위를 위협하는 것으로 오인하여 그를 의심하고 죽게 만들었다.
이 일화는 조조(이재명)가 권력을 유지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안위나 정치적 생명에 위협이 될 수 있는 '쓴소리'를 하는 비판적 내부자나 독립적인 법률적 조언(혹은 사법적 판단)을 묵살할 때 발생하는 자가당착을 상징한다. 조조는 자신의 건강(통치 기반)을 회복하는 데 가장 필요한 처방을 거부함으로써 스스로를 더욱 깊은 고립과 위기 속으로 몰아넣었다. 권력의 압박과 끊임없는 논란에 시달리는 실용주의적 지도자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냉철하고 독립적인 비판이었으나, 권력의 속성상 그 비판을 가장 먼저 제거하려 하는 모순을 보여주는 것이다.
역사에 새겨진 탁류의 흔적
난세 영웅의 숙명과 교훈은
조조(이재명)가 난세에 등장하여 중원을 호령한 것은 단순한 우연이 아니었다. 그의 리더십은 기존 청류파가 제공하지 못한 실용성과 빠른 실행 속도를 사회에 제공했으며, 이는 붕괴 직전의 국가 시스템을 재건하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탁류의 정치는 명분보다 실리, 도덕적 순수성보다 현실적 성과를 우선시했기 때문이다. 조조의 발언, "차라리 내가 천하를 저버릴지언정, 천하가 나를 저버리지 못하게 하라"는 그의 포퓰리즘적 정책과 공격적인 국정 운영을 정당화하는 철학으로 기능했다.
그러나 이러한 실용주의적 접근은 막대한 대가를 치르게 했다. 오직 재능만을 중시하여 인재를 기용하는 '유재시거'의 원칙은 단기적 효율성을 극대화했지만, 강력한 리더십 아래에서 비판적 목소리가 사라지는 위험성을 낳았다. 또한 적벽대전의 패배에서 볼 수 있듯이, 외부 환경(여론, 법치, 문화적 특성)을 무시하고 오직 힘에 의한 통합만을 추구했을 때 결정적인 정책 실패를 겪기도 했다.
결론적으로 조조의 통치는 여전히 승리로 귀결되지 않았다. 조조는 위왕으로서 막강한 실권을 가졌으나, 유비(탁류의 잔존 명분과 도덕적 가치)와 손권(청류의 법치주의 및 제도적 견제)의 견제 속에서 천하가 삼국 정립의 현실로 재편되는 것을 목도해야 했다. 이는 현대 정치에서도 한 세력이 완전히 승리하여 모든 권력을 장악하기보다, 명분, 실용, 그리고 법치라는 세 축이 끊임없이 견제하며 균형을 이루는 복잡한 현실을 반영한다.
조조의 시대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명확하다. 난세는 언제나 기존 질서가 해결하지 못한 문제들로 인해 발생하며, 이러한 시대에는 도덕적 순수성보다는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이 있는 지도자가 필요하다는 인식이 널리 퍼지게 된다. 탁류의 지도자 조조는 그 시대적 요구에 가장 부합하는 인물이었다.
격변하는 천하, 조조는 멈추지 않는다
"강물을 건너면 배를 버려야 하고, 산을 넘으면 지팡이를 꺾어야 하는 법이다. 과거의 성공에 얽매이지 않고 오직 살아남아 다음 승리를 쟁취하는 것이 간웅의 숙명이다."
조조는 강동의 청류(손권)가 언제 다시 군대를 일으킬지, 유비의 잔존 세력이 어떤 형태로 자신을 공격할지 모르는 혼란의 중심에서 위왕(魏王)의 자리를 지키고 있다. 그의 시대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삼국이 정립된 이 격변의 시대, 조조의 야망과 그를 둘러싼 탁류와 청류의 싸움은 역사에 기록될 다음 장을 향해 쉼 없이 흘러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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