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산이 깊어질수록 송진 냄새가 퍼지고 잣송이가 영글기 시작한다. 작은 씨앗 하나지만, 그 속엔 엄청난 노동과 시간이 담겨 있다. 잣은 소나무과 식물의 씨앗으로, 국내에서는 주로 ‘한국잣(Pinus koraiensis)’이 수확된다. 한때 신라에서 중국으로 수출돼 ‘신라송(新羅松)’이라 불리던 귀한 식재료다.
오늘날에도 잣은 견과류 중에서도 비싼 축에 속한다. 국내산 잣은 1kg당 18만~20만 원 선에서 거래되고, 햇잣 수확철에는 품질에 따라 25만 원을 넘는 경우도 있다. 이유는 채취 과정이 위험하고, 생산량이 많지 않아 희소성이 높기 때문이다.
하늘 위에서 수확하는 씨앗
잣은 잣나무의 솔방울 모양 열매인 ‘잣송이’ 속에 들어 있다. 잣나무는 높이가 20m를 넘는 경우가 많아 사람의 손이 쉽게 닿지 않는다.
채취꾼들은 ‘승주기’라 불리는 발 장비를 신고 나무 꼭대기까지 올라간다. 그 위에서 긴 장대 끝의 낫으로 잣송이를 쳐서 떨어뜨린다. 떨어진 송이는 산비탈이나 덤불 속에 흩어지기 때문에 다시 줍는 일도 만만치 않다. 잣송이는 단단하고 뾰족해 떨어질 때 맞으면 위험해 헬멧을 쓰고 작업한다.
한철 수확기에 몰려 있는 이 작업은 체력과 숙련이 모두 요구된다. 하루 종일 산을 오르내리며 잣송이를 모으면, 모은 양에 따라 하루 일당이 30만 원을 넘기도 한다. 숙련된 채취꾼은 한 시즌 동안 중소기업 연봉에 맞먹는 수입을 올릴 정도지만, 그만큼 사고 위험도 크다.
이처럼 채취 자체가 고된 데다 잣송이를 말리고, 껍질을 털어 씨앗을 빼내는 과정도 까다롭다. 송진이 손에 달라붙어 잘 지워지지 않고, 잣 알맹이를 까는 데에도 기계와 사람의 손이 함께 필요하다. 과거에는 전부 수작업으로 진행돼 잣 한 됫박 값이 금값과 맞먹던 시절도 있었다.
한 알 속에 담긴 고소함과 품격
잣은 작지만 고소함이 깊고, 특유의 향이 있다. 씹으면 오들오들하면서도 부드럽게 녹아들고, 입안에 기름기가 은은하게 감돈다. 이 고소한 향은 단순한 견과류의 풍미를 넘어 한식의 맛을 완성하는 요소로 쓰인다.
잣은 잣죽, 잣국, 떡, 과자, 수정과 등에 쓰였다. 특히 조선시대 양반가에서는 콩 대신 잣을 갈아 국수를 말아 먹는 ‘잣국수’가 귀한 대접 음식이었다. 잣죽 역시 임금의 수라상에 오를 만큼 고급 음식이었다. 강원도 평창에서는 도임상에 잣죽을 올리는 전통이 있었는데, 잣죽 한 그릇을 먹은 도임이 그 맛을 잊지 못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요즘에도 잣은 식용유 대신 기름을 짜거나, 샐러드 드레싱과 파스타, 페스토 소스에 사용된다. 서양에서는 ‘피뇰리(pignoli)’로 불리며, 유럽 잣(Pinus pinea)을 원료로 쓴다. 한국산 잣은 크기가 작고 향이 진해 이탈리아산보다 비싸게 평가받는다.
칼로리는 높다. 100g당 약 670kcal로, 하루 권장량은 10g 정도다. 하지만 식물성 단백질, 불포화지방산, 마그네슘, 비타민E가 풍부해 심혈관에 도움을 주는 견과류로 알려져 있다. 단, 기름기가 많아 과식 시 설사나 피부 트러블이 생길 수 있다.
고급 식품이 된 이유와 오늘의 잣값
잣은 생산량이 제한돼 있고 수확이 어려워 가격이 꾸준히 높다. 국내산 생잣의 경우 1kg당 평균 18만~20만 원, 건조된 알잣은 1kg 기준 22만 원을 넘기도 한다. 대형 마트에서는 200g 소포장 제품이 4만 원 이상에 판매된다.
잣나무 한 그루에서 얻는 잣은 많아야 5kg 남짓이다. 게다가 7~8월에 열린 잣송이를 따서 말리고, 껍질을 까서 알맹이를 빼기까지 최소 3개월이 걸린다. 이 과정이 모두 수작업 위주라 생산성이 낮다.
그럼에도 잣은 꾸준히 고급 선물 세트나 제사, 명절 음식 재료로 쓰인다. 예로부터 ‘청결과 장수’를 상징하는 식재료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조선시대에는 신선이 먹는 ‘영물의 씨앗’이라 불리며 약재로도 사용됐다.
Copyright ⓒ 위키푸디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본 콘텐츠는 뉴스픽 파트너스에서 공유된 콘텐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