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 85% 약가 인하, 글로벌 질서 재편···韓 제약산업 ‘새 게임’ 진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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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 85% 약가 인하, 글로벌 질서 재편···韓 제약산업 ‘새 게임’ 진입

이뉴스투데이 2025-10-30 08:00:00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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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연합뉴스·셔터스톡, 그래픽=김진영 기자]
[사진=연합뉴스·셔터스톡, 그래픽=김진영 기자]

[이뉴스투데이 김진영 기자] 미국이 처방약 가격을 최대 85%까지 낮추는 정책을 본격 가동하면서 글로벌 제약산업의 판도가 흔들리고 있다. 연방정부가 의약품을 직접 판매하고 가격을 통제하는 체제로 전환하며 시장 권력이 미국으로 재집중되는 양상이다. 국내 제약사들 역시 기존 수출·약가 전략이 영향을 받을 수 있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이를 대표하는 상징이 미국 연방정부가 운영하는 의약품 직판 플랫폼 ‘트럼프Rx(TrumpRx)’다. ‘트럼프Rx’는 정부가 환자와 제약사를 온라인으로 직접 연결해 중간 유통 단계를 없애는 일종의 ‘정부 직영 약국’으로, 환자는 제조사로부터 바로 구매해 유통마진과 리베이트가 제거된 가격 혜택을 받을 수 있다. 정부는 2026년 1월 정식 가동을 예고하며 “세계 최저가로 약을 산다”는 목표를 내세웠다.

글로벌 빅파마들도 속속 트럼프Rx에 합류하고 있다. 화이자는 미국 내 생산시설에 700억달러를 투자하는 조건으로 일부 의약품을 최대 85% 할인해 공급하기로 했다. 아스트라제네카 역시 500억달러 투자와 함께 메디케이드 대상 약가를 세계 최저 수준으로 맞추기로 합의했다. 암젠도 콜레스테롤 치료제 ‘레파타’를 기존 대비 60% 낮춘 가격에 판매할 예정이다.

트럼프 행정부는 약가 인하 요구와 함께 생산기지의 미국 이전도 압박하고 있다. 협상에 응하지 않으면 관세를 부과하겠다고 경고하고, 협조하면 관세 유예와 규제 완화 등 인센티브를 제공하는 방식이다. 약가 정책이 사실상 미국 중심 공급망 재편을 이끄는 무역 지렛대로 작동하고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미국은 약가 격차를 아예 통상 이슈로 끌어올리고 있다. 최근 행정부는 무역법 301조를 근거로 주요 교역국의 약가 정책에 대한 조사에 착수했다. 해외에서 낮은 가격으로 공급하는 제품을 미국에서만 비싸게 판매하는 관행을 ‘불공정 무역’으로 보겠다는 취지다. 향후 관세 부과를 정당화할 수 있는 기반을 쌓고 있다는 해석도 제기된다.

블룸버그는 지난 22일 “이번 조사가 약가 협상력을 무역 수단으로 활용하려는 트럼프 행정부의 새로운 접근”이라며 “글로벌 제약사들이 생산과 공급 전략 전반을 다시 설계해야 할 수 있다”고 전망했다.

미국 약가는 다른 선진국보다 평균 3배가량 높다. 이 격차를 줄이겠다는 명분은 현지 여론의 지지를 받는다. 다만 이 과정에서 각국의 보험·약가 체계가 통상 협상의 직접 대상이 되고 있다는 점은 부담이다. 제약사는 물론이고 한국을 포함한 주요 수출국 정부까지 미국의 협상 상대가 될 가능성이 높다.

유통 지형에도 변화 조짐이 감지된다. 미국 정부와 제약사들은 소비자 직접판매(DTC) 모델을 확대하며 기존 보험사·PBM 중심 구조를 흔들고 있다. 직판이 확산되면 도매 유통의 영향력이 약해지고 제조사 측 가격 관여도가 높아질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온다. 시장에서는 이런 흐름이 장기적으로 가격 결정권 이동을 촉발할지 주목하고 있다.

일라이릴리는 당뇨·치매·편두통 등으로 DTC 취급 제품을 늘리고 있으며, 노바티스도 다음 달부터 면역치료제 ‘코센틱스’를 55% 낮춘 가격에 직판할 계획이다. 암젠은 이달 ‘암젠나우’라는 이름의 DTC 서비스를 출시, 콜레스테롤 저하제 ‘레파타’를 정가대비 60% 낮은 가격으로 판매한다. 유통 비용이 줄어 보험 없이도 접근성이 좋아진다는 논리지만, 업계에서는 제약사가 직접 가격과 시장 접점을 확보하려는 움직임으로 보고 있다.

제약·보건 분야는 전통적으로 로비 지출이 가장 많은 산업으로 분류된다. 한국바이오협회 바이오경제연구센터에 따르면 트럼프 미국 대통령 취임 이후 9개월 동안 제약·보건 분야 로비 지출액은 3억3400만달러로 전년 대비 13% 급증했다. 화이자는 올해 3분기에만 270만달러를 집행해 전년보다 155% 늘렸고, 아스트라제네카 역시 로비 규모를 전년 동기 대비 두 배 이상 많은 약 140만달러오 확대했다는 분석이다.

정책 방향이 시장에 영향을 미치면서 동시에 시장의 힘이 정책에 반영되는 구조도 강화되고 있다. 미국 약가 인하 정책이 본격화될수록 업계의 로비 활동이 확대되고, 정책 결정 과정이 산업 이해관계에 더 민감해질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한국 기업들 역시 대미 시장 전략을 재정비하지 않으면 대응 공백이 생길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된다.

글로벌 공급망에도 재편 압박이 커지고 있다. 미국이 약가 협상과 연계해 생산거점을 자국 내로 끌어들이는 흐름이 확산하는 가운데 제조 역량이 특정 국가에 집중될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 이 경우 국가별 공급 안정성이 흔들리고, 생산비 부담이 소비자에게 전가되는 구조가 나타날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미국의 약가 인하 압박이 본격화되면서 일부 글로벌 제약사들은 해외 시장에서 가격 정책을 조정하는 흐름을 보이고 있다. 실제로 일라이릴리는 연내 영국에서 일부 의약품 가격을 대폭 인상, 미국 내 수익성 조정이 해외 가격 정책으로 연결된 사례로 받아들여진다. 미국 중심의 약가 구조가 다른 국가의 환자 부담으로 이어질 가능성도 배제하기 어렵다는 시각도 나오고 있다.

한국바이오협회는 “트럼프 행정부가 내년 1월 최혜국 약가 적용을 목표로 올해 안에 제약사 참여를 더 늘리는 데 집중할 가능성이 있다”고 예상했다. 이어 “의약품 관세 부과 시점도 트럼프Rx와 연동될 여지가 있다”며 “내년 초 적용으로 이어질지, 더 많은 기업을 끌어들이기 위해 일정이 앞당겨질지 주목된다”고 설명했다.

국내 제약산업도 영향권에 있다. 한국무역협회에 따르면 한국 대미 의약품 수출 비중은 17~19% 수준으로, 바이오시밀러를 중심 대미 수출 성장세를 이어왔다. 셀트리온 등 미국 내 생산거점을 확보한 기업은 상대적으로 영향이 제한적일 수 있으나, 국내 생산에 의존하는 기업들은 가격 협상력이 약화될 가능성이 제기된다.

바이오시밀러 중심 수출 전략에도 변화가 예상된다. 미국이 오리지널 약가를 직접 낮출 때 가격 경쟁력이 약해질 여지가 있다. 경쟁 구도가 가격에서 생산 기반과 시장 접근권으로 이동할 가능성도 열려 있어, 국내 산업 전략을 다시 점검해야 할 이유로 거론된다.

국내 제약산업은 원료의약품 자급률이 낮아 공급망 변화에 취약한 구조로 평가된다. 미국 중심의 생산 집중이 심화될 경우 글로벌 원료 수급에 차질이 발생할 여지가 있다. 이에 국내 필수의약품 공급 기반을 강화하고 자급률을 높이는 정책 대응 필요성에 대한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미국의 정책 변화는 국내 약가 제도에도 간접적 압박으로 작용할 여지가 있다. 미국이 자국 내 약가를 낮추는 대신 해외 가격을 상향 조정하도록 유도하는 흐름이 강화될 경우, 한국의 보험재정에도 부담이 늘어날 수 있다. 환자 접근성과 재정 안정성 사이의 균형을 놓고 정책 판단이 복잡해질 가능성도 존재한다.

한 제약업계 관계자는 “미국의 약가 정책은 단순히 가격을 낮추는 차원을 넘어 공급망과 정책 권한을 미국으로 집중시키려는 흐름”이라며 “글로벌 제약 질서가 미국 중심으로 재편될 경, 한국도 기존 ‘저가 공급자’ 모델로는 버티기 어려워진다”고 말했다. 이어 “대미 수출 구조와 협력 방식을 전면적으로 재정비하지 않으면 새로운 경쟁 구도에서 뒤처질 수 있다”며 “글로벌 협력 모델을 유연하게 재정비할 시점”이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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