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단상은 캐나다 록키의 기슭에서 보냅니다. 2025년 G7 정상회의가 열린 캐나다 앨버타주 카나나스키스(kananaskis)는 로키 산맥 인근의 휴양지로 다양한 원주민 커뮤니티가 실제로 거주하는 지역입니다. 널리 알려진 벤프에 비해 생소하지만, 카나나스키스는 캘거리에서 1시간 거리에 있는 로키산맥 동쪽 기슭의 광활한 자연보호 구역입니다. 바로 옆에 있는 벤프 못지않게 풍경이 아름답고 하이킹 코스, 스키장, 골프장, 온천까지 모두 갖춰진 숨겨진 보석입니다.
이곳에서 로키산맥의 웅장한 산들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산등성이 어디쯤 말을 타고 달리는 인디언 전사들의 말발굽 소리가 들리는 듯 합니다. 그리고 그 고요한 산등성이 위로 말을 탄 채 산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는 인디언 전사의 용맹한 모습이 보이는 것 같습니다. 아차, 영화를 너무 많이 본 모양입니다. 정정합니다. 캐나다 원주민들은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한 콜럼버스는 자신이 발견한 땅을 '인도’로 오인해 오늘날 우리를 인디언으로 불리게 하는 큰 실수를 저질렀다”면서 “우리는 이 땅의 원주민(First Nation People)”이라고 강조하고 있더군요. 이곳에서는 공식적으로 유럽인들이 캐나다에 들어오기 전부터 살아왔던 원주민의 총칭으로 <퍼스트 네이션>이라 불립니다.
캐나다 선주민들은 산을 신성하게 여기며 존재의 근원, 신비, 영적 깨달음을 상징하는 공간으로 생각합니다. 밴프 국립공원에도 선주민 말로 '영혼의 호수', '성스러운 버팔로 수호산' 등 자연을 신성시하는 곳들이 많습니다. 사실 많은 민족의 설화와 문화에는 산은 크고 신성할 뿐만 아니라 조상신과 연결되어 숭배의 대상이 되어 왔습니다.
'그런데 웨일스인들도 산을 특별하게 생각했지' (갑자기 웨일스가 떠오른 것은 나중에 보면 알겠지만 잊혀지기 힘든 사례때문입니다.)
문득 젊은 시절, 후배와 함께 웨일스 지역을 향해 떠났던 기억이 떠올랐습니다. 영국은 잉글랜드·스코틀랜드· 웨일스 · 북아일랜드의 연합입니다. 그들은 축구 국가대표도 영국 한 팀으로 나가지 않고 4개 팀이 따로 있을 정도입니다. 그런데 영국에 관한 책에서 웨일스를 소개하는 대목에 이르면 '뷰티풀, 원더풀' 등 온갖 미사여구로 시작되는 산과 숨막히는 자연경관이라고 자랑을 멈추지 않더군요. 런던에 머물던 우리는 영국의 숨겨진 보석, <그린 드래곤의 땅>이라 불리는 웨일스(붉은 용이 그려진 국기, 아래 사진)를 향해 이름모를 항구부터 주도인 카디프시까지 3박 4일 일정으로 구석구석 돌아보았습니다.
웨일스인들은 웨일스가 산으로부터 창조되었다고 믿습니다. 웨일스인들에게 산은 특별한 의미를 지닙니다. 잉글랜드에 대한 자부심의 원천이 바로 산이라 믿기 때문이죠. 북쪽에 위치한 스코틀랜드의 높은 산들을 제외하면 잉글랜드는 낮은 평원이 주를 이루고 있습니다. ‘잉글리쉬 맨’ (아래 사진)이라는 영화를 보면 웨일스인들이 산을 얼마나 소중히 여기는지 잘 나타나 있습니다.
유럽대륙에서 2차 대전이 한창이던 1917년, 영국인 지도 측량사 두 사람이 피농가루라는 산의 높이를 재기 위해 웨일스 지방의 한 변두리 마을을 찾습니다. 소박하면서도 고집 센 이 마을 사람들은 피농가루산에 대해 대단한 긍지를 갖고 있었지요. 마을 사람들의 관심 속에 산의 높이를 측정할 수 있게 된 두 사람은, 피농가루산이 사실은 언덕임을 알게 됩니다. 피농가루의 높이는 980피트, 299m로 산으로 판정되기 위한 높이는 1,000피트에 20피트 (6m)가 모자랐던 것입니다.
이렇게 산이 아닌 언 덕으로 판정된 피농가루는 지도에 등장할 수 없는 처지에 놓이게 됩니다. 이에 상심한 마을 사람들은 자신들이 피농가루의 높이를 높이기로 의기투합합니다. 피농가루가 산이라는 타이틀을 빼앗겨 지도에 이름 없는 언덕으로 남는다는 것은 곧 자신들의 정신이 사라지는 것과 같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이곳은 우리들의 산입니다. 1,000피트 (305m)가 되어야 한다면 신에 맹세코 1,000피트를 만들어야지요.”
흙을 쌓아 6m를 더 높여 '산'을 만들기로 결정합니다. 마을 사람들은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모두 손에 손에 양동이를 들고 흙을 나릅니다. 온종일 작업한 끝에 언덕의 높이를 305미터까지 흙을 쌓는 데 성공하지만, 야속하게도 그날 밤 장대비가 억수같이 쏟아져 공든탑은 무너져 내립니다.
일은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고 측량사들이 떠나야 할 날이 가까워 옵니다. 때마침 그들이 타고 온 자동차가 고장납니다. 자동차 수리공은 자동차를 아주 천천히 고치고, 역장은 기차가 오지 않는다는 거짓말을 합니다. 그리고 미인계와 술까지 동원하며 측량사들의 발길을 붙잡습니다. 미인의 유혹에 빠진 노총각 측량사는 결국, 마을에 더 머물게 되고 마을 사람들은 피농가루 꼭대기로 흙과 돌을 나릅니다. 마침내 산으로 최종 판정을 받은 피농가루. 마을은 축제의 분위기에 휩싸입니다.
그러고 보면 우리의 사고방식으로 볼 때 영국은 참 이상한 나라입니다. 영국은 한반도의 1.1배(약 242,900㎢)로 큰 나라도 아닌데 '표준화된 동화과정보다는 중첩된 정체성의 형태'(앤서니 홉킨스)를 가졌습니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고 고구려인, 백제인들에게 각자의 정체성을 갖게 하고 거기에 신라의 정체성을 더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 얼마나 고된 일입니까? 그런데도 영국은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웨일스가 각각 전통적 정체성을 강화하고 발견하도록 장려하였습니다. 심지어 스코틀랜드, 웨일스에 거의 다른 나라 수준의 지방자치를 허용하는 일까지 합니다. 이 두 곳은 자체 의회도 있고, 스코틀랜드 같은 경우는 자체 화폐까지 발행합니다. 지역의 고유성을 통해 지역적 열망을 충족하도록 권장함으로써 애국심을 고취시킨 것입니다.
오늘 록키산에서 웨일스까지 이어진 생각은 참으로 착잡합니다. 자연과 정체성의 소중함을 되돌아 보니, 지금의 우리는 참으로 심각한 모습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한국은 지금 지방소멸 시대에 이르러, 지방이 서울의 아류가 되어 자신만의 고유성과 차별화된 발전전략을 구사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가 추구하는 문명은 서울공화국이 아니라 지방과 함께 발전하는 폭넓은 발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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