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것] 아티스트 웨이② 아티스트 데이트: 크림 라떼에 이어
[문화매거진=MIA 작가] 몇 달째 작업을 못 했다. 올해 봄, 밴드 동호회 활동을 시작한 이후부터다. ‘작업을 못 했다’라는, 작가에게 어찌 보면 사건-그만큼 작가들이 빈번히 싸우는 주제로서-을 일으킨 주범은 밴드 동호회 활동이 맞다. 변명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더 거슬러 올라가면 이 단초를 제공한 진짜 요인에 다다르는데, 그건 바로 아티스트웨이 워크숍이다.
줄리아 카메론의 저서 ‘아티스트 웨이’를 중심으로 진행된 이 워크숍은 총 12주차로 구성돼있는데, 기본 과제(모닝페이지, 아티스트 데이트)와 더불어 매주 새롭게 부여되는 과제도 따로 있다. 예를 들어 1주차 1번 과제는 ‘매일 아침 시계를 30분 일찍 울리게 맞춰 놓는다’이다. 2번 과제는 ‘아티스트 데이트를 한다’이며, 3번 과제는 ‘시간여행’, 5번 과제는 ‘내면의 자신에게 편지를 쓰기’다. 이렇게 10번까지 이어진다. 주차별 과제 개수는 각기 다르고 꽤 적지 않은 양이어서 작가들은 스스로 원하는 문항을 선택해서 진행하곤 했다. 개인적으로는 한 번에 의도를 파악하기 어렵다는 인상을 주는 내용이 대부분이라고 느꼈다. 그러나 그만큼 작가에게 중요한 건 때로는 작업에서 한 발짝 물러나 새로운 질문을 도출하기 위한 시도들이 아닐까 짐작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나의 문제 아닌 문제는 2주차 7번 과제(117쪽)에서 발생했다. 내용을 그대로 옮기면 아래와 같다.
7. 삶의 파이: 원을 하나 그린 후 파이처럼 여섯 조각으로 나누고 각 조각마다 영적인 일, 운동, 놀이, 일, 친구, 로맨스나 모험 등의 이름을 붙인다. 각 조각에 당신이 그 일을 얼마나 했는지 그 정도를 점으로 찍어 나타낸다(바깥으로 갈수록 잘한 것이고 안으로 갈수록 못한 것이다). 점들을 선으로 연결하면 어떤 점이 부족한지 알 수 있다. 이렇게 하다 보면 당신의 삶의 파이가 거미처럼 보일 것이다. 이 삶의 파이를 이용하면 당신의 삶에서 어떤 점이 부족한지, 어디에 시간을 덜 쓰거나 아예 쓰지 않는지 눈으로 확인할 수 있으므로 남는 시간을 거기에 쏟으면 된다.
나는 과제에서 지시하는 내용 그대로 실천에 옮겼다. 각 부분에 점을 찍고 선을 이어 그래프를 그려 보니 ‘로맨스, 모험’ 부분이 다른 부분에 비해 턱없이 쪼그라든 모양이었다. 어떻게 균형을 맞출 수 있을지 잠시 고민했다.
곧바로 떠오른 건 피아노였다. 어렸을 때부터 좋아했지만 음감이 부족해 잘하지는 못했던 것, 그래서 완전한 취미의 영역으로 남아있었던 것, 늘 동경해 왔던 것, 성인이 되어서는 겨우 기억에 남은 뉴에이지 곡의 부분만을 반복해서 치는 게 전부였던 어떤 것. 그런 의미였던 피아노가 워크숍 과제를 성실히 수행한다는 명목 아래 문득 내게 다시 얼굴을 드러냈고, 별다른 망설임 없이 밴드 동호회를 찾았다. 그리고 어쩌다 공연까지 하게 된 것이다.
단 몇 줄의 기록으로 압축할 수 있는 이 ‘모험’이 진행된 기간은 실제로 6개월 정도였다. 그동안 나는 새로운 사람들을 만났으며 새로운 곡을 알게 되었다. 그 곡들의 악보를 뽑아 오선지 위 음표를 하나씩 세며 더듬더듬 계이름을 읽었다. 지금은 다 잊어버린 코드를 기억해내려고 노력하다가 반주법에 관한 책을 구매하기도 했다. 개인 연습을 위해 이틀에 한 번꼴로 피아노 연습실에 방문했고 그러다 저렴한 신디사이저를 사기에 이르렀다. 원래는 평균 한 달에 한 번만 참석하면 되는 모임이었지만 공연 계획이 어느 정도 구체화되고 나서는 주 1회로 빈도가 늘었다. 공연 직전에는 주말과 평일에도 합주에 나가며 시간을 썼다.
점점 작업 시간이 곡 연습 시간으로 대체되었다는 사실에 부채감을 느꼈다. 소위 말하는 ‘현타’를 맞으며 동료 작가에게 고민을 털어놓았을 때, ‘잠시 멈춰도 된다’라는, 원하는 답을 듣고 편안한 마음으로 다시 피아노 연습에 돌입했다. 그런데 아마 그런 말을 듣지 않았어도 난 그 기간에 작업을 잠시 포기했을 것이다. 즐거웠기 때문이다.
한 번은 먼지 가득한 지하 합주실 안에서 악기와 사람들, 소리에 둘러싸인 내 모습이 혼자서 그림과 씨름하는 지난날의 모습과 비교되어 보인 적 있다. 더 이상 고요 속에 자신을 가만히 둘 수 없었던 건가, 혹은 지겨웠던 걸까 잠시 진단해 보았지만 나는 나를 잘 설명할 수 없다는 기분만 들었다.
다만 음악은 내가 놓으면 얼마든지 놓을 수 있는 것처럼 여겨졌다. 그래서 공연 이후에는 동호회 활동을 그만둬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단번에 결정하지는 못했다. 음악이 너무 좋아져 버렸기 때문이다. 혼자 마주하는 캔버스 바깥에서 여러 사람과 함께 만들어내는 무언가에, 적확히는 어떤 시간에만 가능한 무엇의 매력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작가라서, 그림을 그려야 한다는 의무감으로만 연주를 포기한다는 건 어쩐지 납득하기 어려웠다. 아무래도 그동안 음악이 나를 원하던 어딘가로 이끈 것 같다.
아티스트 웨이에서 중요하게 다뤄지는 개념 중 하나는 ‘동시성’이다. 작가가 무언가 시도할 때 영감을 주는 경험이나 단서가 연속적으로 발생하거나 따라오는 현상을 뜻한다. 정확한 통계가 있거나 과학적으로 증명된 사실은 아니지만, 책에 다양한 사례가 소개되어 있으며 워크숍을 함께 진행한 작가들과 나의 경험들 또한 충분한 근거가 되곤 했다. 그렇다면 음악도, 동시성의 흐름 안에 있을까? 좋은 작업을 하고 싶어 시작한 작가 워크숍으로 나는 그림을 잠시 멈추게 되었다. 핑계일지 모르겠지만 사실이 그렇다면 과연, 다음은 어디일까?
미래에 대한 기대를 걸고 싶지만 지금은 여전히 생계를 위한 일, 그림을 그리는 일, 혼자서 연주하는 일, 함께 연주하는 일, 하면 행복해지는 일을 그냥 하는 일들이 내 안에서 분리되어 존재한다. 모두 자연스러워지면 좋겠지만 시간은 야속하도록 유한하다. 한편 그래서도 어렵지 않게 당연한 결론에 이를 수 있겠다는 생각도 한다. 늘 그래왔듯 바로 가장 힘이 센 동기, 간절한 이야기가 날 움직이게 될 거란 예측이다. 그건 어떤 그림이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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