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술이 금융의 ‘언어’를 바꾸고 있다.
헬렌 레이 런던비즈니스스쿨 교수는 국제통화기금 산하 F&D Frontiers of Finance에 'Stablecoins, Tokens, and Global Dominance'제목의 글에 이같이 밝혔다. 헬렌 레이 교수는 “스테이블코인과 토큰화 기술이 자본 이동, 환율, 그리고 통화패권의 지형 자체를 다시 쓸 것”이라고 경고했다.
28일(현지시간) 레이 교수는 “기술이 국제 통화·금융 시스템을 뒤흔들고 있으며, 그 방향은 공공 부문이 기준을 세우느냐, 민간이 먼저 주도하느냐에 달려 있다”고 진단했다.
스테이블코인은 블록체인 상에서 발행되지만 법정화폐에 고정(peg)돼 가치를 유지하는 디지털 자산이다. 최근 미국의 스테이블코인 법제화 추진과 함께, 민간이 발행하는 ‘디지털 달러’가 국제 결제에서 빠르게 확산되고 있다.
그는 “이 현상은 19세기 민간은행들이 화폐를 발행하던 시대로 회귀할 위험이 있다”며, ‘민간 발권 경쟁(private seigniorage)’이 국제 금융의 공공성을 훼손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스테이블코인은 현재 거래 대부분이 미국 외 지역에서 발생하며, 달러화 결제의 새로운 ‘온·오프램프(on/off-ramp)’ 역할을 하고 있다.
레이 교수는 “국내 금융시스템이 불안하거나 해외결제 규제가 강한 국가에서는 스테이블코인이 사실상 대체 결제수단이자 가치저장수단으로 쓰이고 있다”고 밝혔다. 이는 단순한 금융 편의성을 넘어, 국가의 통화주권과 재정기반을 약화시킬 수 있는 ‘디지털 달러화(digital dollarization)’ 현상으로 이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레이 교수는 “테더(USDT)와 USDC 등 주요 달러 스테이블코인의 규모는 이미 사우디아라비아가 보유한 미 국채 잔액을 넘어섰다”고 지적했다.
이로 인해 미국은 스테이블코인을 통해 ‘세계은행가(the world banker)’로서의 외부 부채 구조를 강화하고, 결과적으로 달러의 패권을 유지하는 ‘디지털 기둥’을 구축할 수 있다고 평가했다.
하지만 동시에 글로벌 시뇨리지(seigniorage·발권이익)의 민영화(privatization) 가 초래할 정치경제적 부작용도 경고했다. 그는 “민간 발행사가 국채를 담보로 스테이블코인을 찍어내면서 막대한 이익을 독점하고, 규제 완화와 자본 이동의 불투명성을 로비할 가능성이 커진다”는 것이다. IMF와 각국의 암호자산 자본흐름 통계가 아직 ‘걸음마 단계’에 불과하다는 점도 문제로 지적됐다.
스테이블코인 외에도 토큰화(tokenization) 는 새로운 금융 통합 메커니즘으로 부상하고 있다. 이는 기존의 주식·채권 등 실물자산을 디지털 토큰 형태로 기록·거래하는 방식으로, 중앙은행 디지털화폐(CBDC) 및 블록체인 네트워크와 결합하면 국가 간 결제가 사실상 실시간으로 가능해진다.
국제결제은행(BIS)은 이 시스템을 통해 국가 간 CBDC 상호운용이 가능해지고, 기존 SWIFT나 중개은행 없이 자본이 이동하는 ‘프로그래머블 머니’ 시대가 열릴 것으로 보고 있다.
레이 교수는 “이러한 시스템이 통합된 글로벌 거래 네트워크를 만들 수 있지만, 동시에 환율 변동성·통화 간 경쟁·세수 기반 약화를 초래할 수 있다”고 분석했다.
레이 교수는 “새로운 금융 세계에서 ‘신뢰’의 개념이 바뀔 것”이라고 강조한다. 그는 “양자컴퓨팅의 발달로 기존 암호화 방식이 무력화될 가능성이 커지고 있으며, 데이터 무결성(data integrity)을 유지하지 못하는 통화 네트워크는 신뢰를 잃고 대규모 자본유출에 직면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이른바 ‘무결성 프리빌리지(integrity privilege)’, 즉 ‘해킹에 가장 강한 통화 네트워크가 프리미엄을 얻는 시대’가 도래할 것이라는 분석이다.
헬렌 레이 교수는 IMF를 통해 “기술은 국제통화체계를 근본적으로 재편할 것이다. 하지만 그 속도와 방향은 예측 불가능하며, 혁신·규제·로비가 그 흐름을 결정할 것"이라고 분석했다.
AI·블록체인·토큰화가 만들어낼 ‘기술 주권형 금융시스템’은 더 빠르고 효율적이지만, 동시에 더 파편화되고 더 불안정한 세계를 예고한다. 이제 통화의 신뢰는 금리가 아니라 ‘데이터의 진실성’으로 평가받는 시대가 오고 있다.
[뉴스로드] 최지훈 기자 jhchoi@newsroad.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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