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데일리 박준형 기자] 일반인들에게 경동나비엔은 국내에서 보일러를 주로 판매하는 회사다. 1990년대 “아버님 댁에 보일러 놔드려야 겠어요”라는 광고로 유명세를 탄 이후 국가대표 보일러 기업으로의 이미지를 굳혔다. 하지만 보일러 전문 기업이라는 인식이 오히려 경동나비엔의 성장에 발목을 잡았다. 국내 보일러 시장은 2000년대 초반에 이미 성숙기에 접어들었고, 당시 이 회사 매출은 2000억원 미만에 머물렀다.
|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동에 위치한 경동나비엔 사무소에서 만난 김용범 경동나비엔 부사장 겸 경동C&S 대표는 “2005년경 국내 전체 보일러 시장 규모가 8000억원 정도에 불과했다”며 “이 시장의 절반을 장악해봤자 4000억원 밖에 안 되고 이럴 경우 우리는 매출 1조 기업이 절대 될 수 없다는 생각을 했다”고 글로벌 시장 진출 배경을 밝혔다. 김 부사장은 과거 대우전자 연구원과 전략기획팀장을 거쳐 지난 2004년 경동나비엔에 합류했고, 현재 회사 영업·마케팅을 총괄하며 전문 경영인 역할을 하고 있다. 그는 “해외 시장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글로벌 온수기 시장이 30조 이상 되는 시장임을 알게 됐고, 북미 시장 고객들이 풍부한 온수 사용을 선호한다는 점을 파악하고 이 시장을 집중적으로 공략하기 시작했다”고 경동나비엔의 변신 과정을 설명했다. 그는 “온수 품질은 유지하면서도 높은 에너지 효율을 자랑하는 콘덴싱 온수기를 새롭게 개발하는 등 북미 시장 진출을 위한 기술·제품 개발에도 힘을 쏟았다”고 말했다.
경동나비엔은 지난 1988년 아시아 최초로 콘덴싱 보일러를 개발해 국내 난방·온수 산업에 패러다임을 바꿨다. 이 회사가 개발한 콘덴싱 기술은 배기가스에 숨은 열을 한 번 더 흡수해 에너지 사용율을 높여 가스비를 줄여 주고 미세먼지와 온실가스를 감소시킨다. 경동나비엔은 이 같은 기술을 온수기에도 적용해 만든 콘덴싱 온수기를 앞세워 북미 시장을 적극 공략했고, 가스비 절감과 환경 문제에 민감한 북미 시장 소비자들을 사로잡게 됐다고 김 부사장은 설명한다. 그 결과 지난해 기준 경동나비엔 매출의 57%에 달하는 7750억원을 북미 시장에서 벌어들일 수 있었다. 김용범 부사장은 “가스관 교체 없이도 사용할 수 있는 콘덴싱 온수기 제품을 추가로 출시하며 시장 판세를 완전히 바꿔놓았고 현재 북미 콘덴싱 온수기와 보일러 시장에서 시장 점유율 1위를 기록 중”이라고 말했다.
물론 기술력과 함께 철저한 시장 조사도 필수였다. 김 부사장은 “2005~2006년 미국향 제품을 개발하는 중에 아직 제품도 없는 상황에서 미국 법인부터 먼저 세워 기술, 영업, 서비스 조직들을 갖췄다”며 “이를 바탕으로 시장 조사를 2년 넘게 했고, 두 달에 한 번은 미국에 출장 가서 직접 500곳 이상의 소비자 가정의 지하실을 방문해 온수기들을 살폈다”고 말했다. 그는 “새로운 시장에 들어갈 때는 제품 개발 보다 오히려 수요를 파악하고 영업망을 확보하는 시장 개발이 더 중요한 것 같다”고 덧붙였다. 국내 중소·중견기업들이 핵심적인 기술은 다들 한 두 가지씩 가지고 있겠지만 시장을 개척하는 것은 다른 영역이라며 수요조사·영업망 개척 등 새로운 시장을 공부하는데 더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지 중견 기업이 한 단계 더 발전할 수 있다는 게 김용범 부사장의 생각이다.
북미시장에서 성공한 경동나비엔은 이에 만족하지 않고 다른 지역으로 눈을 계속 돌렸다. 현재 총 7개 해외법인(미국, 캐나다, 멕시코, 중국, 러시아, 영국, 우즈베키스탄)을 세웠고 47개국에 제품을 수출 중이다. 김용범 부사장은 “우즈베키스탄을 주축으로 하는 중앙아시아 시장 공략에 힘쓰고 있다”며 “카자흐스탄 보일러 시장에서는 이미 1위를 하고 있고, 2022년에 법인을 설립한 우즈베키스탄에서는 톱3에 진입했다. 중앙아시아 시장은 정부 주도로 인프라 개발이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어 보일러 수요가 더욱 늘어날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최근 북미 시장에 너무 집중됐다는 생각에 시장을 다변화해 가면서 리스크를 낮추겠다는 전략”이라고 설명했다.
|
글로벌 시장에서의 성장을 바탕으로 경동나비엔의 매출은 급증했다. 지난 2000년 1642억원이었던 매출은 2005년 1710억원으로 정체 상태를 보이다가 북미 시장 진출을 본격화한 2000년대 후반 늘어나기 시작해 2010년 2783억원, 2015년 5120억원, 2020년 8734억원을 기록했고, 지난해에는 1조 3539억원까지 증가했다. 24년만에 725%가 늘어났지만 92%를 기록했던 한국 시장 비중은 30% 수준(2024년 기준)으로 줄었다.
경동나비엔은 대기업으로 성장하기 위해 다시 한번 변신을 시도 중이다. 단순한 보일러 제조회사가 아닌 ‘생활환경 솔루션’ 기업으로 탈바꿈하고 있다. 김용범 부사장은 “그동안 광고 덕분에 국가대표 보일러 이미지가 강하지만 국내 보일러 매출만 놓고 보면 전체 매출의 25%에 불과하다”며 “주방기기, 숙면매트, 제습 환기청정기, 에어컨, 홈 네트워크 시스템 등 생활환경 솔루션 기업으로 외연을 확장하고 있다”며 “이 같은 제품들을 시스템으로 연동해 고객들에게 쾌적한 생활환경을 제공하는 게 목표”라고 밝혔다.
경동나비엔은 이를 위해 지난해 SK매직으로부터 가스레인지, 전기레인지, 전기오븐 등 주방가전 3개 품목의 영업권을 인수했고, 지난 6월 구독사업부문을 분리해 경동C&S를 설립하기도 했다. 신설법인인 경동C&S 대표를 겸하고 있는 김용범 부사장은 “전문가를 통해 보일러, 청정기, 주방기기 등을 정기적으로 관리하는 서비스를 제공할 것”이라며 “기존 국내에서 모범적으로 렌탈 사업을 하고 있는 기업들을 잘 참고할 예정이며 해외에서도 이 같은 렌탈 사업을 고려 중”이라고 말했다.
경동나비엔이 이렇게 중견기업으로 비약적으로 발전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무엇일까. 김용범 부사장은 ‘실패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책임을 묻지 않는’ 독특한 기업 문화를 꼽았다. 그는 “2004년에 경동나비엔 연구소에 합류하면서 제가 처음에 만들었던 제품이 실패했다. 이 제품 때문에 회사가 상당한 손실을 보기도 했지만 윗선에서 ‘아이디어는 좋았지만 이런 문제가 있었던 거 같은데 다음에는 이렇게 해보자’며 크게 책임을 묻지 않았다”며 “이런 문화 때문에 지금의 제가 있는 것 같고, 실패를 경험 삼아 성공할 수 있는 많은 인재들을 자산으로 가질 수 있었다”고 말했다. 또 “책임지고 사표를 내겠다는 제게 ‘나가는 게 책임지는 것이 아니고 배운 경험을 바탕으로 다음에는 제대로 만드는 게 책임지는 것이다’라고 했던 임원의 말이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고 덧붙였다.
김 부사장은 중소·중견기업을 이끌고 있는 선후배 기업인들에게는 “기업의 지속가능성을 위해 단기적인 성과 보다는 기술과 사람에 대한 투자를 아끼지 말아야 한다”며 “각자의 업종에서 쌓아온 노하우와 경험을 적극적으로 공유하고 협력하면 국내 중소·중견기업 전체의 경쟁력이 높아질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정부 지원에 대해서는 “가스 보일러 배관 나사의 규격만 봐도 국내와 해외가 다 달라 어려움을 겪고 있다”며 “기업들의 글로벌 진출을 위해 국내와 해외 규격을 서로 맞추는 작업을 해줬으면 좋겠다”고 제안했다.
최근 불거지고 있는 미국 관세 문제는 신중하게 대응책을 준비하고 있다. 경동나비엔의 경우 미국의 고관세 폭탄을 맞고 있는 철강을 원재료로 쓰는 제품이 많아 어느 정도 피해가 예상된다. 김용범 부사장은 “내부적으로 2년 전부터 보호무역이 글로벌 트렌드가 될 것으로 봐 왔다. 미국 고관세에 대비해 선제적으로 물량을 판매하고, 가격을 올리는 등의 조치를 했지만 이는 단기적인 대응책이라는 생각이며 제품 가격과 품질 경쟁력을 높이면서 장기적인 대응을 준비하고 있다”고 밝혔다.
■김용범 부사장 프로필
△1966년 서울 출생 △서울대 전기공학 학사 △대우전자 냉열기연구소 연구원 △대우전자 전략기획팀장 △경동나비엔 연구팀장 △경동나비엔 기술연구소장 △경동나비엔 중국법인 동사장 △경동나비엔 영업마케팅 총괄임원 △경동C&S 대표
Copyright ⓒ 이데일리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본 콘텐츠는 뉴스픽 파트너스에서 공유된 콘텐츠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