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뉴스투데이 김진영 기자] AI가 K반도체를 다시 성장 궤도에 올려놨다. 메모리 단가 반등과 AI 서버 수요 폭증을 타고 수출이 전년 대비 두 자릿수 증가세를 나타내고 있다. 그러나 호황의 중심에는 투자 과열, 공급망 불안, 산업 편중이라는 구조적 리스크가 공존한다. AI가 살린 반도체가 AI 버블 우려와 산업 편중 심화라는 역설적 구조를 만들며 한국 경제의 균형을 흔들 수 있다는 지적도 커지고 있다.
올해 한국 반도체 수출이 사상 최대를 향하고 있다. 산업통상자원부에 따르면 1~9월 누적 수출액은 1197억달러로 전년 동기 대비 16.9% 늘었다. 9월 한 달 수출이 166억달러로 역대 최고치는 물론 사상 첫 160억달러 이상의 성과를 기록했다. AI 서버용 고대역폭메모리(HBM) 수요 급증과 D램·낸드 가격 반등, 시스템반도체 대형 수주가 호황을 뒷받침하고 있다.
글로벌 현장에서도 이런 흐름이 확인된다. 엔비디아 젠슨 황 CEO를 비롯한 AI 거물들이 한자리에 모인 APEC CEO 서밋에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차세대 HBM4 기술 경쟁력을 내세우며 엔비디아 등 핵심 수요처와의 협력 확대를 타진하고 있다.
삼성전자는 HBM4 상용화를 앞세워 추격전을 펼치고 있고, SK하이닉스는 공급 주도권을 유지하며 입지를 강화하는 모습이다. K반도체가 AI 시대 밸류체인 중심에서 주도권 경쟁을 벌이고 있다는 점은 이번 호황이 단순한 기대감에 그치지 않는 근거로 꼽힌다.
하지만 AI 열기가 실물 수요를 앞선다는 진단도 나온다. 한국은행은 “반도체 호황이 전체 수출을 이끌고 있지만 투자 과열 신호가 감지된다”고 설명했다. 전력·데이터 인프라 병목으로 수익성 개선이 지연될 수 있다는 경고도 덧붙였다. MIT 역시 AI로 구조적 수익성을 높인 기업이 전체의 5%에 불과하다고 분석했다.
‘AI 버블’ 우려는 시장에서도 감지된다. KRX 반도체지수는 올해 101% 뛰어 코스피 상승률(68%)을 크게 앞지른 가운데 실체보다 기대가 먼저 반영됐다는 평가가 제기된다. 물론 AI 기업 수익성이 개선 흐름을 타고 있고, 설비투자(CAPEX) 열풍도 내년까지 이어질 것이라고 보는 이가 많다. 다만 재고가 다시 쌓이는 국면으로 전환될 경우 ‘AI 사이클 피로감’이 불거질 수 있다는 관측 역시 만만치 않다.
이진우 메리츠증권 리서치센터장은 AI 업종을 둘러싼 논란에 대해 “버블이라기보다는 과열 국면에 가깝다”고 전망했다. 그러면서 “즉각적인 둔화 조짐은 아니지만, 재고 누적이 시작되는 시점이 성장 속도 조정의 신호가 될 것”이라고 관측했다.
외부 변수도 만만치 않다. 미·중 갈등이 격화되며 중국이 희토류 수출 통제 범위를 확대하자 국내 산업계의 긴장감이 높아지고 있다. 한국은 희토류 금속의 79.8%, 화합물 47.5%를 중국에 의존, 허가 지연만으로도 생산 차질이 불가피한 구조다. 김정식 연세대 명예교수는 “미국이 관세 보복에 나설 경우 한국 수출의 큰 비중을 차지하는 대중 물량이 직격탄을 맞을 수 있다”고 말했다.
공급망 위협이 금융시장 불안으로까지 번지는 조짐도 뚜렷하다. 미·중 갈등에 따른 불확실성이 높아지자 원·달러 환율이 한때 1439원까지 치솟는 등 변동성이 커졌다. 이 여파로 엔비디아를 포함한 글로벌 7개 대형 기술주의 시가총액이 하루 새 7700억달러(약 1105조원) 증발. 지정학 리스크가 실물뿐 아니라 자본시장까지 동시에 흔드는 양상으로 확산되고 있다는 분석이다.
반도체 호황에 대한 경계도 커지고 있다. 한국은행은 이번 흐름을 ‘양날의 칼’로 규정했다. 실제로 반도체는 올해 수출 증가율(6.5%) 중 5.6%포인트를 견인하며 관세 충격을 상당 부분 상쇄했다. 그러나 그만큼 산업 의존도는 더 높아졌다. 반도체 수출 비중은 2000년대 초 10% 수준에서 올해 23%까지 급등했다.
한국은행은 반도체 호황이 미국 관세 충격을 완충하며 수출을 견인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만큼 산업 의존도도 높아졌다고 해석한다. 이미 수출 규모가 높은 수준에 올라 있는 데다 HBM 공급 확대가 보수적으로 이뤄지고 있어 내년에는 성장세가 완만해질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글로벌 AI 투자 증가율 둔화, 올해 선(先)수요 효과 소진, 일부 품목의 관세 부담 가능성도 위험 요인으로 거론. 산업의 주축이 된 반도체가 경기 하강기에는 오히려 한국 경제의 취약성을 드러낼 수 있다는 부담감이 커지고 있다. 임웅지 한국은행 국제무역팀 차장은 “AI 시대 경쟁력은 반도체에 국한되지 않는다”며 “로봇·자율주행차·AI 에이전트 등으로 수요처를 넓히고, 대규모 데이터센터 확충을 통해 안정적이고 저렴한 전력까지 확보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시장에서는 ‘슈퍼사이클’ 지속 여부에 초점이 맞춰지고 있다. JP모건은 AI가 메모리 수요 구조를 근본적으로 바꿔놓았다며 2027년까지 장기 성장세가 이어질 것으로 내다본다. 반면 한국은행은 수출 금액이 이미 높은 수준에 올라 있고, 국내 기업들도 생산능력 확대에 신중해진 만큼 내년에는 증가 속도가 완화될 가능성을 언급. 과거 IT 사이클처럼 과열과 조정이 반복될 수 있다는 경계론도 주목받고 있다.
한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AI 특수가 한국 반도체 수요 기반을 넓히고 있지만, 그만큼 산업 편중과 공급망 리스크도 심화되는 게 현실”이라며 “전력·인재·인프라 투자가 뒷받침되지 않으면 이번 사이클이 조기 둔화할 수 있다”고 밝혔다. 이어 “AI 시대의 반도체는 수출 품목을 넘어 한국 경제의 기초 체력을 좌우하는 영역으로 진화하고 있다”고 부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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