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대 김홍신의 장편소설 ‘인간시장’의 주인공 장총찬은 부패한 권력과 사회의 불의에 맞서 싸운 분노의 화신이었다. 그는 폭력과 타락의 구조 속에서도 인간의 존엄을 지키려 했다. 40년이 지난 지금 세상은 달라졌지만 인간이 거래되는 구조는 여전히 남아 있다. 단지 그 시장의 이름이 ‘하데스카페’로 바뀌었을 뿐이다.
이제 그 시장은 어둡고 좁은 뒷골목이 아니라 스마트폰 화면 속에 있다. ‘고수익 아르바이트’, ‘해외 취업’이라는 가면을 쓴 디지털 인신매매가 전 세계를 무대로 활개친다. 사회관계망서비스(SNS)와 메신저, 구인 플랫폼이 지옥문을 대신 여는 통로가 됐다.
최근 캄보디아에서 발생한 한국인 대학생 박모군 납치·살해 사건은 그 ‘디지털 인간시장’의 실체를 드러냈다. 몸값을 요구하는 전화가 걸려온 직후 그의 시신은 보코르산 남부 인근에서 발견됐다. 현지 경찰은 중국계 온라인 사기조직의 연루를 밝혀 냈고 우리 정부는 뒤늦게 긴급 대응팀을 파견했다. 하지만 이 사건은 거대한 범죄망의 빙산일각이다.
통계는 충격적이다. 캄보디아에서 행방불명된 한국인은 2021년 113명에서 2024년 3천248명으로 폭증했다. 올해 8월 기준으로 귀환하지 못한 인원만 864명에 달한다(법무부 자료). 그러나 정부의 대응은 늘 ‘사건 발생 이후’였다. 피해가 언론에 보도되고 여론이 들끓은 다음에야 대책이 논의된다.
유엔은 이미 5월 한국인을 노린 인신매매 급증을 경고했다. 하지만 정부는 “조사 중”이라는 답변만 반복했다. 외교부, 경찰청, 출입국관리청이 각기 다른 데이터베이스를 운영하면서 협력 체계는 부재했다. 정보가 통합되지 않고 위험이 포착돼도 경보가 울리지 않는 구조적 한계, 이것이 진짜 문제다.
국가정보원은 현재 캄보디아 등지의 스캠 범죄에 가담한 한국인을 1천~2천명 수준으로 추산한다. 그만큼 이 범죄 구조는 단순한 피해-가해의 문제가 아니라 한국 청년들의 생존 불안과 맞닿아 있다. 청년 실업률 5%, 비정규직 증가, 불안정한 일자리 현실은 ‘고수익 해외 알바’의 유혹을 현실적 선택지로 둔갑시킨다. 범죄는 그 틈을 파고든다.
해외 선진국은 이미 ‘사후 대응’이 아닌 ‘사전 예방’으로 체계를 바꿨다. 유럽과 미국은 인공지능(AI)을 이용해 인신매매성 구인광고를 자동 탐지하고 이를 방치한 플랫폼에 법적 책임을 묻는다. 싱가포르와 호주는 경찰·출입국·통신 정보를 실시간 연동해 위험 징후가 감지되면 출국 전에 자동 경고 문자를 보낸다. 이것이 예방 거버넌스다.
우리에게도 이제 필요한 것은 ‘사건 이후의 정부’가 아니라 ‘사건 이전의 정부’다. 출입국 정보, 통신 데이터, 플랫폼 광고를 통합한 감시체계를 마련하고 고위험 지역이나 직종에 지원하는 국민에게 출국 전 자동 경고 알림을 보내야 한다. 허위 구인광고는 즉시 삭제하고 플랫폼 사업자에게 ‘플랫폼 책임제’를 부과해야 한다. 해외 공관은 현지 언론, 교민사회, 비정부기구(NGO)와 협력하는 실시간 정보 허브로 전환돼야 한다.
국가의 존재 이유는 위기 뒤의 수습이 아닌 위기 이전의 보호에 있다. 늦은 대응은 보호가 아니라 방치다. 국민이 위험에 빠지기 전에 움직이는 정부, 그것이 진정한 국가의 품격이다.
‘인간시장’의 장총찬이 외쳤던 인간 존엄의 외침은 지금도 유효하다. 다만 그 시장의 무대가 디지털로 옮겨졌을 뿐이다. 보고서보다 행동, 변명보다 예방, 그것이 인간이 더 이상 거래되지 않는 사회로 가는 유일한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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