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선한 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기력을 채우려는 사람들로 장어집이 북적인다. 불판 위에서 노릇하게 익어가는 장어 한 점에 소스를 찍어 먹으면 쫄깃한 식감과 고소한 풍미가 입안 가득 퍼진다. 장어는 단백질과 지방이 풍부해 예로부터 ‘기력 회복 음식’으로 불렸으며, 지금도 계절이 바뀌는 시기마다 꾸준히 찾는 대표 보양식이다.
그런데 최근 연구에 따르면 우리가 식탁에서 즐겨 먹는 장어의 상당수가 국제적으로 ‘멸종위기종’으로 분류돼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일상적인 보양식으로 여겨지던 장어가 국제적 보호 논의의 중심에 오르면서, 관련 산업과 생태계 관리에 대한 관심도 커지고 있다.
우리가 먹는 장어, 대부분이 국제 기준상 멸종위기종
지난 8월 국제학술지 사이언티픽 리포트(Scientific Reports)에 실린 연구에 따르면, 전 세계에서 소비되는 민물장어의 99% 이상이 국제 멸종위기종으로 확인됐다. 연구진은 중국·일본·미국 등 11개국 26개 도시에서 판매 중인 장어 282점을 수집해 DNA를 분석했는데, 이 중 대부분이 북미 뱀장어·극동산뱀장어·유럽산 뱀장어 등 3종이었다. 이들 모두 세계자연보전연맹(IUCN)이 지정한 멸종위기 어종이다.
한국은 중국(1위), 일본(2위)에 이어 세계 3위의 민물장어 소비국으로 꼽힌다. 즉, 우리가 평소 장어덮밥이나 장어구이로 먹는 장어 대부분이 국제 기준상 ‘멸종위기종’인 셈이다.
이 가운데 '극동산뱀장어'는 한국과 일본, 중국 등 동아시아에서 가장 많이 소비되는 종이다. 한반도와 일본, 중국 동북부 하천에 서식하는 주요한 민물장어로, 국제자연보전연맹(IUCN)은 이 종을 ‘위기’ 단계로 지정하고 있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아직 멸종위기종으로 지정되지 않아 식용으로 거래되고 있다.
산업의 그림자, 보호와 소비 사이의 경계
유럽연합(EU)는 극동산뱀장어를 포함한 ‘뱀장어 속(Anguilla)’ 전체를 협약 부속서에 추가하자는 제안을 추진 중이다. 이미 유럽산 뱀장어를 '멸종위기에 처한 야생동식물의 국제 거래에 과한 협약(CITES)’ 부속서 Ⅱ에 포함했다. 수출입에는 정부 허가가 필수이며, 불법 거래 단속도 강화됐다.
만약 극동산뱀장어도 협약 부속서에 추가한다면 한국도 직접적으로 타격을 받게 된다. 국내 양식 업계는 실뱀장어의 약 80%를 일본, 중국, 대만 등에서 수입하고 있기 때문이다. 수입이 막히면 양식장 운영이 중단되고, 공급 불안과 가격 급등이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극동산뱀장어는 어떤 물고기인가
국제 사회가 극동산뱀장어 보호 논의를 이어가는 이유는, 극동산뱀장어가 그저 식재료가 아니라 하천 생태계의 균형을 유지하는 핵심종이기 때문이다.
극동산뱀장어는 작은 수서생물을 먹고 자라며, 자신은 새와 대형 어류의 먹이가 되는 중간 포식자이자 먹이사슬의 연결 고리로 기능한다. 또한 물이 깨끗한 곳에서만 살 수 있어 하천의 환경 상태를 알려주는 지표 생물로도 꼽힌다.
극동산뱀장어는 민물장어의 한 종류로, 뱀처럼 길고 미끄러운 몸을 지녔다. 몸길이는 보통 60~80cm지만, 크게 자라면 1m가 넘는다. 비늘이 거의 없고 피부에는 점액이 있어 손으로 잡으면 미끄럽다. 이 점액은 세균이 침입하는 걸 막는 천연 보호막 역할을 한다.
눈은 작지만, 어둠에도 잘 적응해 주변을 파악할 수 있으며, 양옆으로 길게 뻗은 지느러미를 이용해 물속에서 매끄럽게 움직인다. 주둥이는 길고 위턱이 돌출돼 작은 물고기나 갑각류, 곤충, 올챙이 등을 잡아먹기에 유리하다. 일반적으로 낮에 활동하지만, 환경이 열악하거나 먹이가 줄어들면 밤에도 움직이며 사냥한다.
특히 극동산뱀장어 ‘회유성 어류’로, 생애 대부분을 강과 하천에서 보내다가 다 자라면 바다로 돌아가 산란한다.
극동산뱀장어를 지키는 새로운 시도
이처럼 생태적 가치가 높고 서식지가 제한된 종이지만, 보호 체계는 여전히 미비하다. 또한 국내에서는 토종 자원을 외래종과 구분하기 어려워, 불법 거래가 이어지는 문제도 심각하다.
이 같은 문제 속에서 국립수산과학원이 새로운 해결책을 제시했다. 지난달 15일 국립수산과학원은 “극동산뱀장어를 20분 만에 판별할 수 있는 유전자 분석 기술을 개발했다”라고 밝혔다. 기존 방식은 8시간 이상 걸려 현장 적용이 어려웠지만, 이제는 간단한 검사만으로 국내산·수입산·외래종을 신속히 구분할 수 있다.
이 기술은 기초적인 확인 도구가 아니라, 불법 유통을 차단하고 토종 자원을 보호하는 기반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동안 수입산 장어가 국내산으로 둔갑하거나, 멸종위기종이 불법 거래되는 사례가 이어졌다. 유전자 판별이 가능해지면 수입산과 국내 토종을 명확히 구분할 수 있어, 불법 어획이나 혼합 유통을 막을 수 있다. 또한 어린 실뱀장어의 출처를 추적할 수 있어 향후 자원 관리에도 도움이 된다.
이 키트가 상용화되면 극동산뱀장어가 외래종에 밀려 사라지는 일을 막고, 국내 장어의 혈통과 자원을 지킬 수 있다. 또한 토종 장어가 어디에 얼마나 살고, 어떻게 이동하는지를 체계적으로 관리할 수 있어 보호 근거도 마련된다.
국립수산과학원 관계자는 “이번 기술은 산업과 생태계를 동시에 보호할 수 있는 수단”이라며 “국제 협약 대응뿐 아니라 국내 자원 보호에도 실질적인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국립수산과학원은 2026년 상용화를 목표로 기술 이전을 추진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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