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우디아라비아가 ‘석유 왕국’이라는 오래된 이미지를 벗고, 글로벌 금융의 중심지로 새롭게 변신하고 있다.
최근 국제 금융사인 바클레이즈(Barclays)가 리야드에 지역 본부를 설립하고 곧 공식 인정을 받을 예정이라는 보도가 전해지면서, 중동 자본시장의 무게중심이 빠르게 이동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 소식은 단순히 한 금융사의 진출이 아니라, 사우디가 런던·홍콩·싱가포르를 잇는 글로벌 금융 허브로 도약하려는 전략의 가시적 성과로 해석된다.
사우디 투자부는 리야드 중심가를 ‘중동 비즈니스 수도(Middle East Business Capital)’로 만들기 위한 대대적인 개편을 진행 중이다.
그 핵심에는 지역본부(RHQ: Regional Headquarters) 프로그램이 있다. 이 제도는 외국 기업이 리야드에 본사를 두면 세제 혜택, 규제 완화, 행정 절차 간소화 등을 보장하는 내용으로, 현재까지 675개 이상의 다국적 기업이 참여했다.
바클레이즈의 진입은 서방 금융권이 다시 리야드를 핵심 시장으로 바라보기 시작했음을 상징한다.
▲ 리야드의 아름다운 야경
이는 사우디 정부가 주도하는 Vision 2030의 핵심 축과도 맞닿아 있다. 석유 수출에 의존하던 경제구조를 금융, 서비스, 첨단산업 중심으로 다각화하겠다는 국가 비전이다.
실질적으로 석유를 제외한 비(非)석유 수출이 꾸준히 증가세를 보이고 있으며, 2025년 들어 전년 대비 30% 이상 성장했다는 공식 통계도 발표됐다.
비석유 부문의 국내총생산(GDP) 비중은 이미 56%를 넘어섰다. ‘석유의 나라’ 사우디가 ‘자본의 나라’로 변모하고 있는 셈이다.
이와 동시에 정부는 내부 시장의 질적 관리에도 박차를 가하고 있다.
최근 사우디 내무부는 단 일주일 만에 불법 체류자 14,039명을 추방했다고 발표했다. 걸프 뉴스와 사우디 가제트는 이번 조치를 “노동시장 정비와 외국인 체류 관리 강화의 일환”으로 분석했다. 외국 자본과 인력을 끌어들이는 개방정책과 함께, 불법·비정규 체류자들을 정리해 시장 질서를 바로잡겠다는 의도다.
이 같은 조치는 겉보기에는 강경한 단속으로 비칠 수 있지만, 그 이면에는 명확한 경제적 계산이 있다.
▲ 사우디의 노동시장 정책의 변화
사우디는 인구의 절반 이상이 35세 이하의 젊은 세대인 나라다. 젊은 인력에게 안정된 일자리와 숙련된 직업 환경을 제공하지 못한다면 Vision 2030의 지속가능성은 위태로워진다.
정부는 외국인 노동력에 의존하던 구조를 줄이는 대신, 자국민의 숙련도 향상과 교육 투자를 확대하는 방향으로 방향타를 돌리고 있다.
국제 투자업계는 이번 바클레이즈의 리야드 진출이 ‘사우디 금융자율화 2.0 시대의 신호탄’이 될 것으로 보고 있다.
사우디 중앙은행(SAMA)은 이미 외국계 은행의 라이선스 발급 절차를 완화하고, 현지 펀드 매니지먼트 및 자문업 진출을 허용하는 등 규제 개혁을 잇따라 내놓았다.
2025년 하반기 열릴 글로벌 투자 컨퍼런스(Future Investment Initiative)에는 세계 주요 금융사 CEO들이 대거 참석할 예정이며, 사우디는 이를 통해 리야드를 ‘세계 자본의 교차점’으로 각인시키려 한다.
한편, 비석유 수출의 성장세는 사우디 경제 다변화의 현실적 결과로 나타나고 있다.
알루미늄, 석유화학 제품, 플라스틱 가공품, 의료기기, 첨단 장비 등 다양한 산업군에서 수출액이 급등하고 있으며, 수출국도 과거 미국·중국 중심에서 동남아·유럽·아프리카로 다변화됐다.
이는 단순한 수출 확대가 아니라, 사우디 제조업과 기술산업이 글로벌 공급망에 편입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사우디 정부 관계자들은 “리야드가 2030년까지 중동 금융의 70%, 글로벌 투자 흐름의 30% 이상을 담당하는 허브가 될 것”이라고 전망한다.
실제로 수도 리야드에는 최근 3년 사이 50층 이상 높이의 초고층 금융빌딩이 30개 이상 신축되었고, 뉴욕·런던 출신의 투자은행, 로펌, 컨설팅사들이 잇따라 사무소를 열었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속도보다 신뢰’가 중요하다고 지적한다. 금융허브로서의 위상은 단순한 물리적 인프라가 아니라, 투명한 법치, 안정적 계약 환경, 인권 및 노동 기준의 국제적 신뢰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사우디는 여전히 여성 노동 참여율, 언론 자유, 사법 독립성 등의 문제에서 비판을 받는다. 이러한 요소들은 해외 투자자의 장기적 신뢰 형성에 중요한 변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우디의 전환은 중동 경제 질서를 바꿀 잠재력을 지닌다. UAE 두바이, 카타르 도하, 바레인 마나마 등이 기존 금융 중심지 역할을 했지만, 사우디는 자국의 인구 규모와 자본력, 정책 추진력을 무기로 보다 장기적·전략적 금융 허브로 성장하려 한다.
한국 역시 이 변화에서 눈여겨볼 대목이 있다.
한국의 금융회사와 건설·에너지·ICT 기업들은 이미 사우디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있으며, 금융허브화는 새로운 투자·금융 연계 기회를 열어줄 것이다.
사우디 리야드가 런던과 홍콩 사이의 ‘제3의 금융허브’로 성장한다면, 한국의 자본시장 역시 그 네트워크에 편입될 수 있다.
결국 사우디의 변화는 단순한 경제 개혁이 아니라 국가 정체성의 전환이다. 석유에서 금융으로, 자원에서 사람으로, 폐쇄에서 개방으로의 진화다. Vision 2030은 이제 선언이 아니라 현실이 되었고, 리야드는 새로운 중동의 심장으로 뛰고 있다.
사우디의 미래는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세계의 자본과 기술, 그리고 젊은 인재들이 이제 리야드를 주목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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