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썰 / 안중열 기자] 말레이시아 아세안 정상회의 참석차 출국한 이재명 대통령이 또 하나의 외교 승부수를 띄웠다. 미국이 예고한 대(對)한국 수입품 관세를 완화하는 대신, 한국이 3500억달러 규모의 미국 내 투자와 1000억달러 규모의 에너지 구매를 약속하는 협상 프레임이 공개되며 파장이 커지고 있다. 이는 단순한 외교 이벤트를 넘어 산업·무역 구조 전반을 뒤흔들 ‘경제안보 패키지’로 평가된다. 오는 29일 경주에서 열리는 한·미 정상회담이 협상의 분수령이 될 전망이다.
◇관세 협상, 교환의 조건으로 재편된 ‘패키지 딜’
미국은 최근 “‘자유무역의 불균형’을 이유로 한국산 제품에 최고 25%의 관세를 부과하겠다”고 경고했다. 한국 정부는 과도한 조치라며 반박하면서도 협상 테이블을 유지했고, 결국 미국이 관세율을 15%로 낮추는 대신 한국이 미국 내 투자와 에너지 구매를 약속하는 형태로 조율됐다.
이번 협상의 핵심 쟁점은 세 가지로 압축된다.
한국 산업이 감당할 수 있는 투자 규모의 현실성, 관세 인하가 수출기업의 실질적 이익으로 이어질 수 있는지 여부, 산업 보호정책과 미국의 시장 개방 요구가 충돌할 가능성이다. 여기에 외교·안보 현안이 경제협상에 종속될 위험까지 겹치며 ‘관세 담판’은 한국 외교의 구조적 시험대가 되고 있다.
◇수출 의존 경제의 구조적 리스크
한국은 반도체·자동차·배터리 등 수출 의존도가 높은 산업 구조를 갖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관세 인상은 곧 경쟁력 약화로 이어진다. 협상 조건이 기업에 과도한 부담이 될 경우 단기적으로는 수출 감소와 환율 불안, 장기적으로는 외국인 투자 위축과 금융시장 불안정으로 확산될 수 있다.
정부는 산업별 영향을 정밀 분석하기 위한 전담 태스크포스를 가동했다. 미국 내 투자와 에너지 구매 약정이 기업의 재무 구조와 경영 전략에 미칠 중장기 영향을 평가하는 것이 핵심이다. 산업계는 이번 협상이 단순한 무역조정이 아니라 산업 구조 전반의 재편 압력으로 작용할 가능성에 주목하고 있다. 합의 방향에 따라 기업의 투자 및 공급망 전략이 크게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외교 무대의 흐름 속 ‘경제안보 외교’
이번 순방은 단순한 외교 일정이 아니다. 아세안 정상회의와 아세안+3, 이어지는 APEC 정상회의까지 ‘경제안보·공급망·디지털 전환’이 핵심 의제로 부상하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이 재집권 후 처음 아세안 회의에 참석하면서, 경주 APEC 회의는 사실상 한·미 관세 협상의 최종 무대가 될 가능성이 크다.
트럼프 행정부는 반도체와 첨단산업을 ‘안보 산업’으로 재정의하며 동맹국의 산업정책에도 직접 관여하고 있다. 이에 따라 한국은 관세정책과 산업 요구를 동시에 관리해야 하는 복합 과제를 안게 됐다. 이번 순방은 관세 협상만이 아니라 외교·산업·안보가 교차하는 ‘경제안보 패키지 외교’의 실험장이다. 한국이 동아시아에서 어떤 외교 좌표를 선택하느냐가 관건이다.
◇균형외교와 산업 분산 전략
한국 정부는 대응 전략을 세 갈래로 나눴다.
미국과의 협상에서는 균형외교를 유지하면서 중국·아세안과의 공급망 다변화를 병행한다. 산업부와 무역부는 기업별 부담을 최소화하기 위한 세부 조율에 착수했다. 미국 내 투자 약정이 일부 대기업에 집중되지 않도록 중견·중소기업을 포함한 산업별 분산 방안을 검토 중이다. 또한 협상 구조와 파급효과를 국민에게 투명하게 공개하는 ‘정책 커뮤니케이션 강화’ 전략도 병행한다. 관세 인하 효과가 기업별로 달라지는 만큼, 실제 혜택과 부담을 명확히 알릴 계획이다.
대통령실 고위 관계자는 “산업계와의 사전 조율을 강화해 한·미 협상이 산업 경쟁력 강화로 이어지도록 관리하겠다”고 밝혔다.
◇경주 APEC, 성패를 가를 분수령
협상 향배는 세 가지 시나리오로 요약된다.
가장 긍정적인 시나리오는 관세율 15% 인하가 현실화되고 투자 약정이 양국 산업 협력 강화로 이어지는 경우다. 중간 수준은 협상이 타결되지만 약정 부담으로 한국 기업의 미국시장 대응이 제약을 받는 상황이다. 최악의 경우는 약정 이행이 지연되거나 산업 부담이 확대돼 관세 리스크가 장기화하고 외교 전략까지 흔들리는 결과다.
경주 APEC 정상회의는 이번 협상의 분수령이 될 전망이다. 한국이 주도권을 확보하고 실질적 성과를 끌어낼 수 있을지에 따라 한·미 경제 관계의 향방뿐 아니라 동아시아 외교 질서의 균형도 달라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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