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시간 감시 사회
당신의 손에 들린 그 작은 사각형의 금속과 유리 조각. 스마트폰. 그것은 더 이상 단순한 통신 기기가 아니다.
그것은 당신의 기억을 외주 준 외장 하드이며, 당신의 인간관계를 전시하는 사교의 광장이고, 당신의 내면을 기록하는 비밀스러운 일기장이다.
당신의 자아는, 어쩌면 당신의 육체보다 그 안에 더 많이 존재한다.
그런데 어느 날,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그가 당신의 영혼과도 같은 그 상자의 비밀번호를 요구한다. “우리는 숨기는 게 없는 사이니까.” 그는 웃으며 말한다. 당신이 망설이는 그 찰나의 순간, 그는 이미 당신을 ‘무언가를 숨기는 사람’으로 규정한다.
출근한 당신의 주머니 속에서, 그의 불안이 GPS 신호가 되어 당신을 추적한다. 당신이 누구를 만나는지, 누구의 게시물에 ‘좋아요’를 눌렀는지, 그가 당신의 디지털 동선(動線)을 1분 1초 단위로 감시한다.
당신은 사랑받고 있는 것인가, 아니면 사육당하고 있는 것인가.
나는 여기서 단언컨대, 이것은 사랑의 투명성이 아니라고 말하고 싶다. 이것은 21세기의 기술이 선사한 가장 완벽한 형태의 ‘디지털 감옥’이다. SNS와 GPS는 그 자체로 악하지 않다. 그것은 연결을 위한 도구다.
하지만 가해자의 불안한 손에 쥐어지는 순간, 이 도구들은 당신의 영혼을 24시간 감시하는 가장 효율적인 통제의 족쇄로 돌변한다.
오늘 우리는 이 신종 감옥이 어떻게 설계되고, 당신의 자아를 어떻게 무너뜨리는지 그 작동 원리를 해부하려 한다.
투명한 감옥의 설계: SNS와 영혼의 식민지화
가해자가 당신의 스마트폰 비밀번호를 알아내는 순간은, 단순한 정보 접근 권한을 얻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당신이라는 영토의 주권을 포기하라는 요구이며, 당신의 정신세계에 그의 감시 초소를 세우는 것을 허락하는 항복 선언이다. 이 디지털 식민지화는 극도로 체계적인 방식으로 진행된다.
1. 감시의 내면화: ‘디지털 판옵티콘’
그는 당신의 모든 SNS를 샅샅이 훑는다. 당신의 카카오톡 대화 목록, 인스타그램 DM, 팔로잉 목록, 심지어는 몇 년 전 게시물의 ‘좋아요’ 목록까지. 당신은 그의 이 집요한 ‘디지털 감사(監査)’에 질려버린다.
- - “이 남자, 왜 아직 팔로우하고 있어?”
- - “이 사진에 ‘좋아요’ 누른 쟤는 누구야?”
- - “아까 대화방에서 왜 그 말에 대답 안 했어?”
처음에는 저항했을 것이다. “사생활이야”라고. 하지만 그는 당신을 ‘뭔가 구린 게 있는 사람’으로 몰아붙인다. 이 피로한 싸움이 반복되면, 당신은 결국 저항을 포기하고 스스로를 검열하기 시작한다.
나는 이것이 미셸 푸코가 말한 ‘판옵티콘(Panopticon)’의 완벽한 디지털 구현이라고 본다. 판옵티콘은 중앙의 감시탑에서 모든 죄수를 볼 수 있지만, 죄수는 감시탑이 자신을 보고 있는지 알 수 없는 원형 감옥이다.
핵심은, 감시자가 ‘있을 수도 있다’는 사실만으로, 죄수가 스스로를 24시간 감시하게 만드는 내면화된 통제다.
그가 당신의 폰을 실시간으로 보고 있지 않을 때조차, 당신은 그가 ‘볼 수도 있다’는 생각에 사로잡힌다.
- - 친구의 웃긴 사진에 ‘좋아요’를 누르려다 멈칫한다. (혹시 이 친구가 남자라서?)
- - 안부를 묻는 옛 동료의 메시지에 답장하기 전에, 그가 오해할 만한 단어가 있는지 수십 번 검토한다.
- - 내 기분을 표현하는 솔직한 글을 썼다가, 그의 심기를 건드릴까 봐 지워버린다.
결국 당신은, 그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스스로의 생각과 표현을 거세한다. 당신의 SNS는 더 이상 당신의 공간이 아니다. 그것은 그가 언제든 검열할 수 있는, 그를 위한 전시 공간으로 전락한다.
당신은 당신의 삶에서 유령이 되어간다. 당신의 손으로 당신의 목소리를 지우는 이 자기 파괴의 과정이야말로, 그가 의도한 가장 완글벽한 승리다.
2. 과거의 박제와 사회적 고립
디지털 세계는 과거를 지우지 않는다. 그것은 모든 것을 기록하고 박제한다. 이 ‘영원한 현재성’은 가해자에게 무한한 통제 거리를 제공한다.
그는 당신이 그를 만나기 전, 5년 전에 올렸던 사진 속의 옛 연인을, 혹은 당신이 기억조차 못 하는 이성 친구의 댓글을 찾아낸다. 그리고 그것을 현재의 당신을 공격하는 재료로 사용한다. “넌 원래 이런 애였구나.”
당신은 당신의 과거 전체를 해명해야 하는 끔찍한 피고인석에 앉게 된다. 이 고통스러운 심문을 피하기 위해, 당신은 당신의 과거가 담긴 모든 게시물을 지우고, 과거와 연결된 모든 친구를 차단하기 시작한다.
나는 이것이 가해자의 ‘고립’ 전략이 디지털 시대에 맞게 진화한 형태라고 본다. 과거의 가해자는 당신의 현재 친구들만 만나지 못하게 했다.
하지만 현대의 가해자는, 당신의 디지털 기록을 무기 삼아, 당신의 과거 인맥과 역사 자체를 소멸시켜버린다. 당신은 뿌리가 잘린 나무처럼, 현재의 그에게만 의존해야 하는, 역사도 과거도 없는 존재가 되어간다.
전자 발찌와 공간의 사유화: GPS가 묶는 것들
SNS가 당신의 정신과 사회적 관계를 통제하는 도구라면, GPS는 당신의 육체와 물리적 공간을 통제하는 도구다. 이 두 가지가 결합할 때, 감시는 완벽해진다.
1. ‘안전’이라는 이름의 가장 이기적인 구속
그는 당신의 아이폰 ‘나의 찾기’ 기능을 공유하자고 하거나, 커플용 위치 추적 앱을 설치하자고 제안한다. 그가 내세우는 명분은 언제나 숭고하다.
“네가 험한 세상에서 다칠까 봐 걱정돼서 그래.”, “서로 어디 있는지 알면 믿음이 더 깊어지지.”
나는 이 ‘안전’이라는 단어가, 통제욕을 포장하는 가장 위선적인 단어라고 생각한다. 그가 걱정하는 것은 당신의 안위가 아니다.
그가 걱정하는 것은,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변수, 즉 ‘당신의 자유의지’가 작동할까 봐 두려운 ‘자기 자신의 불안’이다. 그의 불안을 해소하기 위해, 당신의 기본권인 사생활의 자유가 제물로 바쳐지는 것이다.
GPS 공유에 동의하는 순간, 당신은 그의 스마트폰 지도 위에 떠 있는 하나의 ‘점’이 된다. 당신은 더 이상 인격체가 아니라, 그가 실시간으로 모니터링하는 하나의 자산(asset)이다.
2. 시간과 공간의 완벽한 통제
GPS는 가해자에게 신(神)의 시점을 부여한다. 그는 당신의 모든 움직임을 꿰뚫어 본다.
- - “퇴근했다면서, 왜 아직 회사 근처야?”
- - “집에 가는 길이라더니, 왜 10분 동안 그 자리에 멈춰 서 있어? 누구 만났어?”
- - “지금 당장 그 자리에서 사진 찍어서 보내봐.”
당신은 더 이상 당신의 시간을 자유롭게 쓸 수 없다. 퇴근길에 잠시 서점에 들러 책을 구경하는 그 사소한 자유조차, 그에게는 ‘보고되지 않은 이탈’이며 ‘잠재적인 배신’이 된다.
당신은 알리바이를 증명하기 위해 영수증을 찍어 보내고, 당신의 동선을 분 단위로 보고해야 한다.
이것이 파괴하는 것은 단순히 당신의 자유가 아니다. 이것은 ‘혼자 있을 권리’라는, 인간의 가장 근본적인 존엄성을 파괴한다.
인간은 타인의 시선에서 벗어나, 누구에게도 설명할 필요 없는 자신만의 물리적, 심리적 공간을 가질 때 비로소 온전한 자아를 유지할 수 있다.
아무도 나를 보지 않는다는 그 안정감 속에서만 우리는 긴장을 풀고, 스스로와 대화할 수 있다.
하지만 24시간 추적당하는 당신에게는 그 ‘혼자만의 공간’이 허락되지 않는다. 당신의 육체는 언제나 그의 디지털 시선 안에 포획되어 있다.
당신은 화장실에서조차 그가 지도 위의 점을 보고 있을 거라 상상하며 불안에 떤다. 그는 당신의 공간을 사유화하고, 당신의 시간을 식민지화함으로써, 당신이 스스로의 주인이 될 가능성 자체를 박탈한다.
우리의 시대는 투명성을 미덕으로 삼는다. SNS는 자신을 드러내는 무대이고, 기술은 모든 것을 연결한다.
하지만 가해자는 이 시대의 미덕을 가장 뒤틀린 방식으로 악용한다. 그는 ‘투명성’을 ‘감시’로, ‘연결’을 ‘구속’으로 변질시킨다.
“우리는 숨기는 게 없어”라는 말은, 건강한 관계의 슬로건이 아니라, 일방적인 감시를 정당화하는 독재자의 슬로건이다.
나는 감히 주장한다. 건강한 관계는 모든 것을 공유하고 감시하는 ‘투명성’ 위에 세워지는 것이 아니라고. 그것은 서로가 보이지 않는 영역을 기꺼이 존중하고 믿어주는 ‘신뢰’ 위에 세워지는 것이다.
신뢰란, 내가 보지 못하는 당신의 시간을, 내가 알 수 없는 당신의 마음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어주는 선택이다.
그가 당신에게 요구하는 것은 신뢰가 아니다. 그것은 신뢰가 필요 없는 완벽한 감시 시스템, 즉 ‘증명’이다.
그리고 끊임없이 증명을 요구하는 관계는, 그 시작부터 이미 사랑이 아니라, 불신과 통제에 기반한 권력 게임이었음을 스스로 고백하는 셈이다.
당신의 스마트폰은, 당신의 디지털 자아는, 그의 불안을 잠재우기 위한 제물이 아니다. 그것은 당신이라는 우주를 담고 있는, 당신만이 주권을 가진 신성한 영토다.
그 영토의 비밀번호를 넘겨주는 것은 사랑의 증표가 아니라, 나 자신에 대한 주권을 포기하는 행위다. 그리고 그 어떤 사랑도, 당신의 주권보다 우위에 설 수는 없다.
By. 나만 아는 상담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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