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도보다 합리성”… 이 대통령, 한미 관세협상 ‘장기전’ 시사

이 대통령이 CNN과 인터뷰 하는 모습 [사진=대통령실]

이재명 대통령이 23일 공개된 CNN 인터뷰에서 “한미 관세협상은 시간이 조금 더 걸릴 것 같다”며 APEC 정상회의(경주)까지 타결이 어려울 수 있음을 내비쳤다. 단기 성과보다 국익과 구조적 합리성을 우선하겠다는 의지를 공식화한 셈이다.

이 대통령은 “미국의 합리성을 믿는다”며 “결국 두 나라가 이성적으로 납득할 수 있는 합리적인 결과에 이를 것”이라고 말했다. 이는 트럼프 대통령이 연일 “관세가 협상을 이끌었다”고 압박하는 가운데서도 ‘이벤트성 합의’ 대신 실질적 조율을 중시하겠다는 메시지로 풀이된다.

양국 협상의 최대 난제는 3500억달러 규모의 대미 투자펀드 조성 방식이다. 미국은 “총액은 그대로 유지하되 현금 비중을 최대한 높여야 한다”고 주장하는 반면, 한국은 외환시장 충격과 재정 부담을 고려해 분할·혼합 투자 방식을 제안하고 있다.

정부 관계자에 따르면 현재 양국은 연 150억~250억달러 수준을 8~10년 이상 분납하는 방안을 놓고 협의 중이다. 외환 사정을 감안하면 선불 투자(일괄 지급)는 현실적으로 어렵다는 입장이며, 대신 일부 프로젝트 투자나 민관펀드 방식으로 현금 부담을 낮추는 방안이 논의되고 있다.

대통령실 한 관계자는 “경기와 환율 여건이 유동적인 만큼, 투자액을 협정문에 수치로 명시하는 것은 신중해야 한다”며 “장기적으로 족쇄가 될 수 있다”고 밝혔다.

이번 협상은 투자펀드뿐 아니라 자동차·철강·배터리·반도체 등 주요 수출 품목의 관세 인하 또는 유예 문제와도 직결된다. 트럼프 행정부는 ‘공정무역’을 내세워 고율관세를 지렛대로 삼고 있으며, 한국 측은 이에 상응하는 투자·고용 확대 패키지로 대응 중이다.

통상전문가들은 “관세율의 일괄 인하보다 조건부·단계적 조정 형태가 유력하다”며 “성과 지표를 충족하면 관세를 조정하는 방식으로 합의문이 설계될 가능성이 높다”고 분석한다.

트럼프 대통령은 다음주 경주에서 열리는 APEC 정상회의 기간 중 방한해 한미 정상회담을 가질 예정이다. 그러나 양국 모두 ‘완전 타결’보다는 원칙적 합의에 무게를 두고 있다.

외교가에서는 △‘동맹·상호호혜·공정무역’ 원칙 선언 △분야별 후속 채널 설치 △세부 일정 협의 등의 ‘프레임워크(기본 틀) 합의’ 가능성이 높다는 전망이 나온다.

이 대통령이 이번 인터뷰에서 거듭 ‘합리성’을 강조한 것은 국내 시장의 불확실성을 최소화하고 실질 이익을 극대화하겠다는 전략적 계산으로 읽힌다. 특히 투자규모나 환율 충격 등 ‘숫자 중심’ 접근보다, 조건·유연성·검토 조항이 포함된 협정 구조를 선호하는 기조가 뚜렷하다.

트럼프 대통령의 관세 압박이 정치적 효과를 노린 단기 승부라면, 이재명 정부는 “시간이 걸리더라도 이성적이고 지속 가능한 합의로 가겠다”는 입장을 명확히 한 셈이다.

자동차 업계는 관세 안정화 여부에 따라 수익성이 좌우되고, 배터리·반도체 업계는 미국 내 투자 프로젝트의 인센티브 연계 여부가 관건이다.

외환시장에서는 투자 집행 규모와 속도에 따라 원화 강세·채권금리 변동성이 달라질 것으로 예상된다. 분납 구조가 확정될 경우 단기 충격은 완화될 전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