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겉보다 중요한 건 작동 방식이다. 정치는 말과 행동으로 움직이지만, 그 이면에는 언제나 고유한 ‘문법’이 존재한다. 법과 제도의 언어, 권력의 계산, 대중의 심리, 미디어 전략과 정치 언어 등이 어떤 타이밍에 움직이며, 무엇을 감추고 드러내는지는 단순한 논쟁 너머의 작동 규칙을 따른다.
〈정치문법〉은 한국 정치의 핵심 이슈와 정국 전개를 단순한 사건 나열이 아닌 정치 구조, 전략, 심리, 제도 작동 방식의 측면에서 분석해본다. 정치를 이해하고 싶다면, 정치의 문법부터 파악하라.
【투데이신문 박애경 발행인】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국정감사가 ‘대법관 증원’ 사법개혁안을 둘러싸고 격렬한 공방으로 치달았다. 현장검증의 범위를 둘러싼 절차 다툼, 일부 의원의 이해충돌 논란, 지역 법원의 비위 사태까지 얽히며, 논쟁은 숫자의 문제가 아니라 권력 분배와 제도 설계의 문제로 확장됐다. 여야는 각각 ‘적체 해소’와 ‘사법 장악 저지’라는 깃발을 들었지만, 민심이 묻는 질문은 한 가지다. “국민이 체감할 재판의 속도와 품질은 어떻게 바뀌는가.”
국감 현장에서 본 쟁점 지형
법사위는 지난 15일 대법원 청사에서 이례적인 ‘현장 국감’을 진행했다. 민주당 주도로 대법정, 대법관실 등을 둘러보는 현장검증이 시도됐고, 국민의힘은 “사법장악, 사법부 길들이기”라며 회의장 밖에서 공세를 폈다. 민주당은 “상고 적체의 실상을 시민 눈앞에 보여주겠다”고 했지만, 국민의힘의 보이콧으로 국감 시작부터 절차를 둘러싼 항의와 정회가 반복됐다.
검증 과정에서는 디지털 로그·업무 시스템 자료의 제출 범위를 놓고 ‘업무 점검’이냐 ‘재판 개입’이냐는 해석 싸움을 벌였다. 민주당은 “로그 파일 등 행정적 자료만 확인하려했을 뿐 야당이 주장하는 ‘기록열람’은 허위”라 했고, 국민의힘은 “대법관 PC, 재판기록을 들여다보려 했다”며 “재판 독립의 금도(禁度)를 넘었다”고 맞섰다. 이 논쟁은 법사위 회의장으로 번져 파행의 도화선이 됐다.
이어 일부 의원을 둘러싼 이해충돌 문제가 테이블로 올라왔다. 지난 20일 춘천지법 김재호 법원장(배우자)이 피감기관 증인으로 출석하는 날, 나경원 의원은 “이해충돌이 아니다”면서 “춘천지법엔 질의하지 않겠다. 본인 질의 시간 외에는 이석하겠다”고 방어막을 쳤다. 그럼에도 민주당은 “명백한 이해충돌”이라며 공세를 이어갔다. 이해충돌 방지를 위해 제도가 필요하다며 ‘간사·직책 제한’ 카드까지 띄웠다. 장내는 여야 간 신상발언과 항의로 긴장이 고조됐다. 도덕성 프레임이 입법 논쟁을 밀어내는 순간이었다.
한편 지방 법원의 비위 의혹은 국감장의 온도를 더 끌어올렸다. 이달 21일부터 22일까지 근무시간 음주, 노래방 소동 등으로 논란이 된 제주지법 부장판사 3명에 대한 질타가 이어졌다. 이들이 불출석 사유서를 내고 동행명령에도 응하지 않자, 법사위는 고발 방침을 의결하며 격분했다. 관련 카카오톡 대화, 접대·골프 의혹 등 추가 쟁점도 도마에 올랐다. 사법부는 뒤늦게 사과했고, ‘재판 준비’를 ‘불출석 이유’로 든 해명을 내놓았지만 여론은 싸늘했다.
이날 가장 뜨거운 쟁점은 바로 ‘대법관 증원’과 ‘재판소원 도입’ 등 민주당의 ‘사법개혁 패키지’였다. 국민의힘은 “위헌·사법 독립 침해”라고 규정했고, 민주당은 “위법성 없고 4심제도 아니다”라고 반박했다. 국감장이 ‘개혁 청문회’가 된 순간이었다.
더불어민주당의 사법개혁 패키지의 핵심은 대법관 정수를 현행 14명에서 26명으로 늘리는 것으로, 상고 적체를 물량으로 돌파하겠다는 내용이다. 동시에 추천·인사·평가 체계 손질을 묶어 ‘재판 품질’ 문제까지 건드리겠다는 포석이 깔렸다. 정책 패키지로 설계한 만큼, 국회 다수와 정부 권한이 맞물릴 때 단기간 제도 변경도 가능하다는 계산이 읽힌다.
대법관 14→26 증원, 속도가 아니라 설계
대법관 증원의 필요성 자체는 새롭지 않다. 대법원 상고 사건은 매년 수만 건에 달하고, 대법관 1인당 처리해야 할 사건 부담이 과중하다는 지적은 꾸준히 있어왔다. 2023년 기준 상고사건 약 3만7000여건, 1인당 3000건대의 부담 추정은 다수 통계와 기사에서 반복적으로 확인된다.
이러한 부담 과중은 판결 지연과 판시의 불균형 논란을 낳고, 국민의 최종심 신뢰까지 흔든다. 여야가 같은 데이터를 보면서도 서로 다른 처방을 꺼내드는 이유가 여기서 출발한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관건은 “얼마나 빨리 늘릴 것인가”가 아니라 “어떤 운영 모델로 늘릴 것인가”에 맞춰진다.
증원은 결코 단독변수가 아니다. 재판연구관·전산·통계 인프라와 함께 움직여야 하고, 하급심 인력·예산의 연쇄 조정이 따라붙어야 한다. 상고부·전문화 트랙을 어떻게 나누고, 전원합의체의 역할을 어떻게 재설정할지 ‘운영 디테일’이 따라주어야 실질적 효과를 얻을 수 있다.
‘하급심 적체 먼저’라는 반론도 힘을 얻는다. 2023년 소송 총량이 전년 대비 8% 증가해(약 666만 건) 1심 처리지연이 더 문제라는 분석이 제기된다. 대법관 증원 논의를 하급심 개선과 함께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다.
예산 문제도 뇌관이다. 법정·집무공간, 보조인력, 정보화 시스템 등 물리적·인적 인프라에 대한 총사업비와 단계별 집행계획이 투명하게 제시돼야 한다. ‘현장 국감’에서도 비용, 공간 문제를 두고 논쟁이 일었다. 실제로 법정, 집무공간, 연구인력 등 물리적 인프라가 뒤따라야 한다. 다만, 정확한 산출근거, 세부계획 등이 투명하게 공개돼야 정쟁을 피할 수 있다. 숫자와 돈, 그리고 시간표를 가감 없이 공개하는 것이 신뢰의 출발점이다.
무엇보다 ‘품질’을 제도화해야 한다. 판결문 공개·요지 정리의 실효성, 사건군별 표준 처리기간, 상고 허가·심사 기준의 명문화 등 ‘사법 KPI’를 법률·규정에 심어 두어야 대법관 증원이 국민의 긍정적인 체감으로 연결될 수 있다.
정치적 시간표와 제도 설계의 엇박자도 변수다. 국민의힘은 “왜 지금이냐”며 현 정부 임기 내 대다수 임명함으로써 편향성 우려를 낳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에 민주당은 “적체가 임계점”이라면서 차기 정부도 다수 임명 가능하다는 논리로 맞불을 놓았다. 여당은 ‘개혁 타이밍’을, 야당의 ‘권력 타이밍’이라는 프레임으로 각자의 정치문법을 맞춰가고 있다.
재판소원, 4심제인가 권리구제 보완인가
대법관 증원 문제와 함께 뜨거운 감자가 된 논쟁은 이른바 ‘재판소원’ 공론화이다. ‘재판소원’은 대법원 확정판결 단계 이후의 권리 구제 확대를 말한다.
민주당은 “위헌·위법 판단의 정밀도를 높이는 권리 보완”이라고 주장하고, 국민의힘은 “사법권 독립의 침해이며 사실상의 4심제 도입”이라고 위헌성을 제기한다.
제도 취지는 ‘헌법적 권리 구제의 보완’이다. 하지만 대법원 최고법원성, 헌재와의 권한 경계, 신속재판권 침해 가능성 등 구조적 쟁점이 얽혀 있다. 대법원의 최고법원성과 헌법재판의 범위를 어떻게 분리·연동할지, 두 제도의 보완관계를 어떻게 설계할지부터 합의가 필요하다. 방송·토론 등에서도 ‘공론화 선행’의 필요성이 제기됐다. 섣부른 도입은 사건 폭주와 지연을 불러올 수 있다는 것이다. 무엇을 언제, 어떤 기준으로 가동할지 로드맵을 제시하지 못하면 ‘권리 확대’는 곧 ‘절차 혼란’으로 번질 수 있다.
재판소원이 4심제냐 아니냐는 명칭 다툼보다, 국민이 납득할 수 있는 심사 기준과 결정 공개가 관건이다. 왜 내 사건은 취급되고, 왜 다른 사건은 문턱을 넘지 못했는지가 데이터와 사례로 설명돼야 한다.
요컨대 ‘권리’와 ‘효율’은 대립이 아니라 균형의 문제다. 문턱을 낮추되, 남용을 억제하고, 심사를 신속히 처리하는 운영 기술이 준비되지 않으면 개혁의 명분은 곧바로 불신으로 환원된다.
민주당의 명분과 계산, 적체 해소 & 제도·인사 프레임 관리
민주당 개혁안의 골자는 3년간 매년 4명씩, 총 12명을 순차 증원해 대법관을 26명으로 늘리는 ‘점증형 증원’이다. 다수의 소부·합의체를 돌려 사건처리 속도를 끌어올리고, 전원합의체를 2개 트랙으로 운영하는 구상까지 거론된다. 데이터로 뒷받침되는 ‘속도와 품질’의 명분이 전면에 나온다.
그러나 정치는 명분만으로 굴러가지 않는다. 이 안이 통과되면 이재명 대통령 임기 중 임명 가능한 대법관 수가 대폭 늘어난다는 점이 즉각 부각됐다. 민주당은 “제도는 현 정권을 넘어 장기적으로 작동한다”고 선 긋지만, 국민의힘은 “사법부 인사 지형의 구조적 재편”으로 해석한다. 제도개편과 인사권이 얽히는 순간, 개혁은 ‘권력 설계’ 프레임에 갇히기 쉽다.
이러한 인사 편향 프레임을 희석하려고 민주당은 ‘추천·평가’의 외부성·다양성 확대를 패키지에 담았다. 법원행정처장 배제, 외부 위원 비중 확대, 하급심 평가제도 개선 등 절차적 장치를 더해 ‘사법부 내부의 자기완결성’을 낮추겠다는 접근이다. 제도 보완을 통해 증원 효과가 ‘조직 관성’에 흡수되지 않게 하겠다는 뜻이기도 하다.
정치적으로도 계산은 있다. 증원은 이해관계가 분산되는 사안이라, 의료·교육·노동 등 극한 충돌 의제보다 협상 가능성이 높다는 판단이 깔렸다. ‘성과 가능한 개혁’으로 국정 동력을 확보하겠다는 메시지다. 다만 인사·권력 변수로 프레임이 다시 재조정되면, 어느 순간 협상 테이블이 단박에 ‘정치 전쟁’ 테이블로 바뀔 수 있다는 위험도 함께 존재한다.
다시 말해, 민주당의 명분은 ‘적체 해소’와 ‘사법접근성 개선’, 정치적 계산은 ‘현실 가능한 성과’와 ‘제도·인사 프레임 관리’로 볼 수 있다. 명분을 살리려면 제도 설계의 촘촘함이, 계산을 숨기려면 인사 투명성의 과감함이 필요하다.
국민의힘의 역프레임, 사법 장악 & 4심제 논쟁
국민의힘의 첫 번째 프레임은 간명하다. ‘대법관 증원은 곧 정권의 사법 장악 로드맵’이라는 것. 특히 임기 중 다수 임명이 가능하다는 수치가 논쟁의 불쏘시개가 됐다. 국민의힘은 이를 ‘법원 독립성 흔들기’와 결합해 정치적 쟁점화를 만든다.
두 번째 프레임은 ‘4심제 논쟁’이다. 민주당의 개혁안에 담긴 ‘재판소원(헌법재판소식 권리구제 확대) 공론화’가 사실상 4심제의 문을 연다는 비판이 뒤따랐다. 국민의힘은 “상고심 적체를 해소한다더니, 오히려 사법 비용과 지연만 키운다”고 비판에 가세했다.
국민의힘은 대안으로 상고심사제(허가제)와 사건 유형별 필터링, 대법원 전문부 강화 같은 ‘질적 해법’을 앞세운다. 숫자 확대보다 ‘문 앞 심사’를 촘촘히 해야 한다는 논리다. 동시에 전직 대법원장의 상고법원 추진 실패 사례를 소환해 “물량 해법은 반복적으로 좌초됐다”고 지적한다.
정치 전략상 국민의힘은 ‘속도 지연’ 카드도 가진다. 인사·추천·평가 조항을 별도 법안으로 쪼개 처리하거나, 헌법적 쟁점(사법권 독립·권력분립)을 전면화해 헌법재판소 판단을 압박하는 방식이다. 이 과정에서 증원안은 ‘시간의 정치’에 갇힌다. 시간이 길어질수록 야당인 국민의힘은 방어에 유리하고, 여당인 민주당은 동력 소진에 취약해진다.
결국 국민의힘의 승부수는 ‘사법장악 vs 사법독립’ 프레임을 얼마나 오래 유지하느냐에 달려 있다. 증원안의 기술적 타당성을 넘어서, 정치적 정당성 싸움으로 무대를 옮기는 것이 핵심 전략이다.
정치 프레임戰 그 너머
민주당은 ‘적체 해소’와 ‘사법 접근성 개선’을, 국민의힘은 ‘사법 독립’과 ‘권력의 균형’을 전면에 내세웠다. 두 프레임은 각자의 지지층 결집에는 유효하지만, 중도 여론의 질문인 “그래서 무엇이 언제 어떻게 바뀌나”에는 불친절하다.
이번 법사위 국감은 현장검증 범위, 증인 출석·동행명령, 발언권 배분 등의 절차적 변수가 ‘정당성’의 싸움으로 이어졌다. 이해충돌 논란과 비위 사건의 소환은 ‘도덕성’ 경쟁을 과열시켰다. 민주당이 제기한 대법관 증원과 재판소원과 같은 사법개혁안은 정치적 논쟁으로 확대되면서, 오히려 제도에 관한 본안 논의가 흐려질 위험이 커졌다.
정치문법상, 이번 대립에 있어 여론의 신뢰를 선점할 승부처는 ‘설계’에 있다. 운영 매뉴얼·예산·시간표·공개 기준을 투명하게 공개하는 쪽이 국민의 동의를 얻을 수 있다.
사법개혁의 핵심은 인사·평가·공개의 보이는 절차다. 대법관을 늘려도 사건 선별·심리 기준, 판결 공개·설명, 영장 심문 절차가 촘촘하지 않으면 체감은 낮다. 법사위 국감이 남긴 교훈은 분명하다. ‘정치의 말’이 아니라 ‘제도의 문법’으로 설계와 집행을 증명하는 쪽이 민심을 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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