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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플릭스 오리지널 다큐멘터리 ‘명사들의 마지막 한마디’에서 세계적인 동물학자이자 환경운동가로 최근 별세한 제인 구달은 자신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침착하다’는 말은 별것 아닌 듯 보이지만 사실은 그 안에 굉장한 의미가 담겨 있다. 그건 거꾸로 말해 전혀 ‘침착하지 못한 인류’의 경솔함을 꼬집는 말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구달이 말하는 ‘침착함’의 뜻은 동물 행동을 연구해 온 그녀의 삶을 관통하는 이야기다. 인간을 포함해 동물에게 공격성은 타고난 본능인가 묻자 그녀는 자신이 침팬지들과 함께 살며 했던 경험을 빌려 “그렇다”고 말한다. 누군가 공격성을 드러내면 그것이 집단 전체로 전염병처럼 퍼져 나간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공격성의 기저에 깔린 감정에 대해 그녀는 ‘분노와 불안’을 거론한다. 지배권을 빼앗길 것 같은 상황 속에서 상대에 대한 분노와 더불어 불안을 느끼는데 그것이 공격성으로 표출된다는 것. 그건 침팬지들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인간들이 그토록 누군가를 공격하고 심지어 대량 살상을 하는 전쟁을 치르거나 혹은 대자연을 파괴함으로써 삶의 터전을 서서히 망가뜨리는 일들이 바로 그 전염병처럼 번져나갈 위험성을 가진 분노와 불안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라는 이야기다. 그런 점에서 구달이 말하는 ‘침착함’이란 바로 그 대척점에 위치한 감정 상태일 것이다. 어떤 상황에서도 화를 내거나 조급해하지 않고 차분함을 유지하는 것. 그것이 위기에 처한 세상을 구하는 일이라고 구달은 말하고 있었다.
‘죽은 뒤에 공개하는 인터뷰’라는 독특한 형식을 취하고 있는 ‘명사들의 마지막 한마디’의 첫 번째 에피소드로 등장한 구달의 모습은 ‘침착함’ 그 자체였다. 죽을 것을 상정하고 하는 인터뷰이니 어딘가 비장할 것처럼 보이지만 구달은 완전히 정반대였다. 시종일관 차분한 목소리로 솔직하게 있는 그대로의 자신과 세상에 대한 이야기를 밝히면서 유머와 농담을 잃지 않았다. 남편과 자식에 대한 지극히 사적인 이야기에서부터 자신이 이 ‘행성’에 보내진 이유 같은 너무나 공적인 사명에까지 거침이 없었다.
그 침착함에는 삶 전체를 통과한 자의 관조적인 시선이 더해졌다. 물론 제인 구달의 침착함에는 특별함이 존재했지만 마치 유언처럼 전하는 마지막 인터뷰라는 점이 어쩌면 그 침착함을 더더욱 두드러지게 했을지도 모른다. 우리 같은 보통 사람들에게 그 광경은 생의 마지막에 이르러 많은 욕망이 부질없어지고 오히려 평온한 감정을 마주할 자신을 미리 보는 것만 같은 느낌을 줬을 테니 말이다. ‘마지막’이라는 관점은 그래서 중요해 보였다. 이대로 가면 지구가 종말에 이를 거라는 걸 구달이 아니라도 누구나 알고 있지만 그럼에도 이토록 어리석게 그 행동들을 바꾸지 않는 건 어쩌면 그 ‘마지막’이라는 관점을 우리가 늘 잊고 살기 때문이 아닐까. 모든 게 결국은 끝나고 누구나 저 대자연의 한줌 흙으로 돌아가게 된다는 걸 늘 생각한다면 우리의 선택도 달라지지 않겠는가.
구달은 그래서 나와 생각이 다른 이들을 바꾸고 변화시키는 데 있어서 ‘공격’은 절대 통하지 않는다고 강변했다. 공격은 결국 저들의 분노와 불안만을 키울 것이고 그것은 저들의 맞공격으로 이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대신 “뜻이 다른 사람을 만났다면 먼저 얘기를 들어 보라”고 했다. 그들의 이야기 속에도 자신이 미처 몰랐던 발상이 있을 수 있다며. 그런 다음에도 자신의 생각이 옳다면 공격하고 싸울 것이 아니라 ‘가슴으로 다가가야’ 한다고 했다. ‘머리싸움’은 절대 소용이 없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녀가 강조한 것은 마음을 움직이는 ‘이야기’다.
“실제로 대기업 최고경영자(CEO)들 앞에서 연설을 많이 해요. 싱가포르의 한 CEO가 있었어요. 연설을 마치자 다가와서 말했어요. ‘저를 바꾼 건 우리 딸이었습니다. 여덟 살인데 하루는 학교에 다녀와서 이렇게 말했어요. 아빠 사람들이 그러는데 아빠가 하는 일이 지구를 아프게 한대요. 사실 아니죠, 아빠. 지구는 내 행성이잖아요.’ 그런 게 가슴에 닿아요. 내가 그 이야기를 전달하면 또 다른 가슴에 가닿아요.”
나와 생각이 다른 이들 앞에서 감정을 드러내고 공격하거나 애써 논리를 내세워 자신의 의견을 관철하려 하기보다는 차분히 그 이야기를 듣고 가슴으로 다가가는 것. 구달이 말하는 이야기란 ‘예술’의 효용을 닮았다. 머리로 설득하려 하기보다는 마음으로 공감시킴으로써 때론 삶의 변화를 불러일으키기도 하는 예술, 특히 스토리의 힘 말이다.
흔히들 스토리라고 하면 논리적인 서사를 떠올리지만 사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감각과 감정 같은 것들이다. 똑같은 이야기도 지루함과 재미를 가르는 건 그 이야기를 하는 이가 얼마나 감각과 감정을 건드리는가에 달렸다. 머리로 들어온 이야기는 쉽게 휘발하지만 가슴에 닿아 슬픔과 연민까지 건드리는 이야기는 오래도록 마음에 남고 때론 그 사람의 삶의 방향을 바꾸기도 한다. 구달은 아프리카로 날아가 그 오지에서 살며 느끼며 배운 것들을 논리가 아니라 감각과 감정을 건드리는 스토리로 전함으로써 깊은 울림을 줬다. 시간이 흘러 마지막 인터뷰 내내 그녀가 어떤 이야기를 했는가를 우리가 기억해낼 수 없다고 하더라도 적어도 그녀가 보여준 ‘침착함’이나 유쾌한 유머 감각 등은 결코 잊히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비언어적 표현’으로 대자연 속에서 삶의 깨달음을 얻은 자가 어쩌면 우리에게 전하는 ‘비언어적’ 메시지인지도 모르겠다.
제인 구달의 인터뷰를 보고 나면 시끌벅적한 세상의 많은 일들이 새삼 생경하게 느껴진다. 지독하게 이어지고 있는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나 전 세계에 관세 폭탄을 던지고 있는 미국 도널드 트럼프 정권은 물론이고 국내 정치권에서 매일같이 벌어지는 머리싸움들이 그저 어리석게 여겨진다.
무엇이 그리도 화가 나고 불안한가. 침착하게 상대방의 말을 듣고 어째서 가슴으로 다가가지 못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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