몬트리올에서 묵은 숙소가 차이나타운 근처입니다. 많은 호텔들이 도심에 위치한 차이나타운과 도보로 5분 이내의 가까운 거리에 위치해 있습니다. 우리 일행은 어슴푸레 어두워지는 시간에 역사와 관광지가 집중된 올드 몬트리올로 가서 겸사겸사 식사까지 해결하고자 호텔을 나왔습니다.
횡단보도의 신호가 파란불로 바뀌길 기다릴 때였습니다. 차량 5대가 차이나타운으로 지나가는데 차량 앞에 번호판이 보이지가 않습니다.
'어, 무슨 차량이지?' 하는 궁금증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옆으로 지나가는 다른 차량들 역시 앞 번호판이 없습니다. (사진 1, 주차장 차량에 앞 번호판이 없다)
"왜죠?"
"캐나다는 주별로 다양한 규칙을 가지고 있습니다. 퀘벡을 비롯한 5개 주에서는 앞 번호판을 필요로 하지 않는 법률을 가지고 있습니다."
전문 가이드인 정중호씨가 답합니다. 차량은 앞뒤에 번호판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는 나의 오랜 고정관념이 흔들립니다. 더 특이한 점이 자동차 번호판 하단부에는 " Je me souviens(주므 스븨앙)"이란 프랑스어 문장 (사진2) 이 새겨져 있습니다. 영어로 'I remember'이니 "나는 기억한다"는 뜻입니다.
캐나다의 13주 중 유일하게 영어가 아닌 프랑스어로 표기된 주 표어입니다. 깨끗하고 밝은, 그러면서 평화로운 국가 이미지를 가진 캐나다에도 복잡한 집안 사정이 있는 줄은 알았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습니다.
'나는 기억한다'는 사실 '나는 영원히 잊지 않겠다'로 해석하면 더 선명해집니다.
1883년 퀘벡 시의회 건물의 정문에 새겨진 이 문장은,
'나는 기억한다. / 백합(lis)에서 태어났고 / 장미(rose)에서 자라났음을'
에서 온 것입니다.
백합은 프랑스를, 장미는 영국을 의미합니다. 1534년 프랑스 식민지로 시작했으나 1763년 7년 전쟁의 결과로 영국령이 된 역사를 세 문장으로 함축한 것입니다. 비록 영국제국의 지배를 받게 되었으나, 프랑스인으로서 정체성과 역사, 문화를 절대 잊지 말고 항상 간직하자는 다짐입니다.
'나는 기억한다'라는 문구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 퀘벡과 관련된 중요한 역사적 사건을 살펴보겠습니다.
1534년 프랑스 탐험가 자크 까르티에가 '강폭이 좁아지는 곳'이라는 뜻의 퀘벡을 발견합니다. 퀘벡은 프랑스의 식민지가 되지만 너무 추운 탓에 정착에 실패합니다. 이후 1608년 프랑스 탐험가인 '사무엘 드 샹플렝'에 의해 정착지 건설이 이뤄져 북미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 중 하나가 됩니다. 특히 몬트리올은 품질이 뛰어난 비버모피의 무역 중심지로 각광을 받아 큰 성장을 이룹니다.
문제는 유럽대륙에서 발생합니다. 오스트리아 후계전쟁에서 패한 오스트리아가 빼앗긴 땅을 되찾기 위해 프랑스·러시아와 손잡고, 프로이센 (영국과 연합)과 전쟁을 벌입니다. 이 불똥이 그들의 식민지가 있던 북미 아메리카와 인도에까지 퍼졌습니다. 훗날 윈스턴 처칠이 '18세기의 세계대전'이라고 했던 이 전쟁은 영국과 프랑스 뿐만 아니라 북아메리카의 원주민 부족들까지도 참여했는데요. 두 나라는 각기 다른 부족들과 동맹을 맺으며 영향력을 넓혀 갔습니다.
하지만 1759년 9월 영국군이 52미터의 가파른 절벽을 기어 올라와 퀘벡의 아브라함 평원에 교두보를 확보합니다. 영국과 프랑스의 지휘관이 모두 전사할 정도로 치열한 평원 전투를 벌였지만, 영국군이 압도적인 군세로 퀘벡을 점령함에 따라 프랑스의 북미 지배는 사실상 막을 고합니다.
"Je me souviens"은 바로 이 전투의 패배로 인해 영국의 치하에서 살아가야 하는 수모가 내포되어 있습니다.7년동안 지속된 전쟁에서 영국이 승리하게 되고, 프랑스는 캐나다와 북아메리카 대부분의 영토를 영국에 양도(1763년 파리조약)하게 됩니다.
내가 몬트리올에서 발견한 것은 이 도시에 대한 그들의 애정이었습니다. 이 도시에 대한 애정은 물론 이 도시에 베어 있는 역사에 대한 애정이었습니다.
'역사를' 배우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역사에서' 배우는 것입니다.
'우리는 절대 잊지 말아야 할 것을 잊고 사는 것은 아닐까?'
다시 생각해 봐도, 언어·문자·습속·문화가 다른 일본에 의한 조선의 지배는 두 배나 더 치욕적입니다. 일본의 가장 큰 실수는 태평양 전쟁을 일으켜 패전한 것이 아니라, 문명국 조선을 식민지화한 것입니다. 그들은 두고두고 후회할 것입니다.
무궁화의 나라가 벚꽃에 뒤덮였던 치욕의 날을 너무 쉽게 잊고 사는 것은 아닌지 먼 캐나다 땅에서 자문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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