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일도 당신 탓이 아닙니다.
폭력의 태풍이 지나가고, 당신이 마침내 무너진 집의 잔해 속에서 몸을 일으켰을 때. 당신은 상처 입은 몸을 이끌고 세상 밖으로 도움을 청했을 것이다.
하지만 당신을 맞이한 세상의 첫마디는, 따뜻한 위로나 공감이 아니었을 가능성이 높다.
- - “왜 진작 헤어지지 않았어?”
- - “대체 왜 그렇게까지 참아왔던 거야?”
- - “너한테도 무슨 문제가 있었겠지.”
이 질문들은 순수한 호기심의 탈을 쓰고 있지만, 그 본질은 날카로운 칼날이다. 그것은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묻는 것이 아니라, ‘네가 왜 그 일을 당하도록 방치했는지’를 추궁하는, 명백한 기소장이다.
가해자의 손아귀에서 벗어난 순간, 당신은 두 번째 재난과 마주한다. 바로 ‘피해자’라는 이유로 당신에게 씌워지는 사회적 낙인. 나는 여기서 단언컨대, 이 2차 가해는 단순히 불운한 부수적 피해가 아니라고 말하고 싶다.
이 사회적 낙인이야말로, 가해자가 당신을 가두었던 그 보이지 않는 감옥의 벽을 세운 공범이다.
그것은 가해자의 논리를 정당화하고, 피해자의 입을 틀어막으며, 폭력이란 시스템이 이 사회에서 안전하게 존속하도록 유지하는, 가장 교활하고 잔인한 사회적 방어기제다. 당신의 고통은, 그렇게 또 한 번 세상에 의해 배신당한다.
왜 세상은 피해자를 탓하는가?
우리는 피해자를 탓하는 사람들을 그저 공감 능력이 결여된, 못된 사람들이라고 치부해버리고 싶어 한다. 하지만 문제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세상이 피해자를 탓하는 그 이면에는, 평범한 사람들이 자신의 평온한 일상을 지키기 위해 발동시키는, 차갑고 이기적인 심리적 법칙들이 숨어있다.
1. ‘공정한 세상’이라는 위험한 신화
인간은 자신이 발 딛고 선 세상이 예측 가능하고 공정하다고 믿고 싶어 한다. “노력하면 성공한다”, “착하게 살면 복을 받는다”, 그리고 그 이면에는 “나쁜 일은 나쁜 사람에게 일어난다”는 믿음이 깔려있다.
심리학자 멜빈 러너(Melvin Lerner)는 이를 ‘공정한 세상 가설(Just World Hypothesis)’이라고 불렀다.
당신의 존재는 이 신화를 정면으로 위협한다. ‘멀쩡하고 평범해 보이는 당신’이, ‘이유 없는 끔찍한 폭력’을 당했다는 사실. 이 사실은, 이 세상을 살아가는 관찰자들에게는 참을 수 없는 불안을 안겨준다.
왜냐하면, 그것은 곧 ‘나에게도 저런 끔찍한 일이 이유 없이 일어날 수 있다’는 실존적 공포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 고통스러운 모순 앞에서, 그들이 자신의 안전한 세계관을 지킬 수 있는 방법은 단 하나다. 세상이 불공정하다고 인정하는 대신, 피해자인 당신에게서 ‘그럴 만한 이유’를 찾아내는 것이다.
- - “그녀가 너무 예민했겠지.”
- - “그녀의 성격에 문제가 있었을 거야.”
- - “그녀가 현명하게 대처하지 못했어.”
그들은 당신을 탓함으로써, ‘나는 저 사람과 다르다. 나는 현명하고, 강하고, 예민하지 않다. 그러므로 저런 일은 나에게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라는 안도감을 얻는다.
결국 당신에게 쏟아지는 그 비난은, 당신을 향한 것이 아니라, 당신의 고통이라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나약함을 향해 던지는 돌팔매질이다. 그들은 당신을 희생양으로 삼아, 자신들의 공정한 세상을 지켜낸다.
2. 복잡성을 견디지 못하는 1차원적 시선
현대 사회는 복잡한 서사를 견디지 못한다. 모든 것은 빠르고, 단순하며, 명확해야 한다. 선과 악, 영웅과 악당, 피해자와 가해자. 하지만 당신이 겪어낸 학대 관계는, 그 어떤 드라마보다 복잡하고 다층적이다.
그는 24시간 내내 괴물이지 않았다. 그는 당신의 생일에 미역국을 끓여주었고, 당신의 농담에 아이처럼 웃었으며, 당신의 미래를 응원하기도 했다. 당신 역시 마냥 순종적인 피해자가 아니었다. 당신은 그를 사랑했고, 그를 변화시키려 애썼으며, 그와 함께한 행복한 기억도 분명히 존재한다.
당신이 이 복잡다단한 진실, 즉 ‘트라우마 본딩’과 ‘인지부조화’의 늪을 설명하려 할 때, 세상은 인내심을 잃는다. 그들은 “그래서 사랑했다는 거야, 싫었다는 거야?”라며 당신의 모호함을 비난한다.
나는 이것이, 우리가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근본적인 이유 중 하나라고 본다. 사회는 피해자에게 ‘순수성’을 요구한다. 지옥 속에서조차 한 점의 혼란이나 모순도 없는, 완벽하게 순결한 피해자의 서사.
하지만 당신이 그 ‘피해자다움’의 틀에 들어맞지 않는 순간, 예를 들어 당신이 그를 떠나지 못하고 망설였거나(트라우마 본딩), 혹은 당신도 맞서 소리쳤다는(반응적 학대) 사실이 드러나는 순간, 당신의 피해 사실은 통째로 ‘진실성’을 의심받는다. “너도 똑같았네”, “쌍방이었네”라는 말과 함께.
세상은 당신의 복잡한 고통을 이해하려 노력하는 대신, 자신들의 1차원적인 틀에 당신을 끼워 맞추려 하고, 실패하자 당신을 ‘자격 미달의 피해자’로 낙인찍어버린다.
3. 가해자의 논리를 내면화한 사회
가장 잔인한 지점은 이것이다. 사회가 당신에게 던지는 비난의 목소리가, 사실은 가해자가 당신에게 수년간 속삭였던 그 목소리와 정확히 일치한다는 것.
- - 가해자: “네가 나를 화나게 만들었잖아.” (책임 전가)
- - 세상: “네가 그 사람을 자극했겠지.” (원인 제공)
- - 가해자: “넌 항상 너무 예민해.” (가스라이팅)
- - 세상: “그 정도는 다들 참고 살아.” (고통의 축소)
- - 가해자: “나니까 너 만나주는 거야.” (자존감 폄하)
- - 세상: “너도 문제가 있으니 그런 사람 만났겠지.” (결함 찾기)
당신은 가해자라는 개인의 감옥에서 탈출했지만, 가해자의 논리가 지배하는 더 큰 사회라는 감옥과 마주하게 된다.
가해자는 자신의 폭력을 정당화하기 위해 당신을 탓했지만, 사회는 자신들의 평온함을 지키기 위해 당신을 탓한다. 목적은 다르지만, 당신을 ‘문제의 원인’으로 지목하는 방식은 소름 끼치도록 동일하다.
낙인이 피해자의 영혼에 새기는 것
이 차가운 사회적 낙인은, 가해자가 남긴 상처 위에 또 다른 상처를 덧입히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그것은 피해자의 남은 삶을 근본적으로 파괴하고, 회복의 가능성 자체를 차단해버린다.
1. 고립의 완성, 그리고 침묵의 강요
가해자가 당신의 삶에서 가장 먼저 한 일은 당신을 ‘고립’시키는 것이었다. 그는 당신의 친구와 가족을 떼어놓았다.
당신이 마침내 그 고립에서 벗어나 세상에 도움을 청했을 때, 당신이 마주한 것이 공감이 아닌 낙인이었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당신은 생각하게 된다. ‘그 사람 말이 맞았어. 세상엔 아무도 나를 이해해 주지 않아.’
당신은 입을 닫는다. 당신의 고통을 증명하는 것이, 마치 법정에서 당신의 결백을 증명하는 것처럼 느껴지는 이 피로한 싸움에 지쳐버린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는 것, 그것이 스스로를 보호하는 유일한 방법이 된다.
나는 이 사회적 낙인이, 가해자가 미처 완성하지 못한 ‘고립’이라는 프로젝트를 완수해 준다고 본다.
이 침묵 속에서 피해자는 외부의 도움 없이 홀로 트라우마를 감당해야 하며, 이 고립감은 종종 피해자를 다시 가해자에게 돌아가게 만드는 가장 큰 동력이 된다. 최소한 그 지옥은, 내가 아는 유일한 지옥이었으니까.
2. 수치심의 내면화: 스스로를 향하는 칼날
가해자는 당신에게 ‘너는 결함 있는 존재’라고 말했다. 세상은 당신에게 ‘너는 결함이 있으니 그런 일을 당했다’고 말한다. 이 두 개의 목소리가 공명할 때, 외부의 비난은 마침내 당신 내면의 목소리, 즉 ‘수치심’이 된다.
수치심은 죄책감과 다르다. 죄책감은 ‘내가 잘못된 행동을 했다’는 것이지만, 수치심은 ‘나라는 존재 자체가 잘못되었다’는 믿음이다.
이 수치심은 당신의 모든 것을 마비시킨다. 당신은 법적 절차를 밟는 것을 포기한다. ‘내 잘못도 있는데, 감히 누구를 처벌해달라고 하겠는가.’ 당신은 새로운 관계를 시작하는 것을 두려워한다. ‘나 같은 결함 있는 사람을 누가 사랑해 주겠는가.’
가해자는 당신의 자존감을 깨뜨렸지만, 사회적 낙인은 그 깨진 조각들마저 가루로 만들어버린다. 당신은 가해자의 폭력에서 살아남았지만, 사회가 주입한 수치심 속에서 스스로를 파괴하기 시작한다.
“왜 떠나지 못했는가?”라는 질문은, 이제 그 방향을 완전히 바꾸어야 한다.
우리가 물어야 할 질문은, “왜 피해자는 떠나지 못했는가?”가 아니라, “왜 우리 사회는 피해자가 그토록 떠나기 어려운 구조로 되어 있는가?”이다.
왜 피해자는 폭력에서 탈출한 이후에도, 자신의 피해 사실을 증명하고, 자신의 결백을 호소하며, 사회의 2차 가해와 싸워야만 하는가?
불이 난 집에서 뛰쳐나온 사람에게, 우리는 “왜 신발을 신고 나오지 않았느냐”고 묻지 않는다. 그가 살아 돌아온 것만으로도 안도하고, 불을 낸 방화범을 비난하며, 집이 왜 그토록 불에 취약했는지를 따진다.
하지만 유독 데이트 폭력에서만큼은, 우리는 방화범이 아니라 불길 속에서 뛰쳐나온 생존자를 심문한다.
만약 당신이 지금 세상의 차가운 시선 속에서 스스로를 탓하고 있다면, 부디 이 하나만은 기억하라. 당신을 향하는 그 모든 비난과 낙인은, 당신의 진실이 아니다.
그것은 자신들의 나약한 평화를 지키기 위해, 당신의 고통을 외면하기로 선택한 세상의 비겁한 변명일 뿐이다.
당신 탓이 아니다. 단 한 순간도, 단 하나의 이유도, 당신 탓이었던 적은 없다.
By. 나만 아는 상담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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