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조 현금 부자' 태광산업의 최대주주인 이호진(62) 고문이 애경산업 인수를 통해 전통적인 석유화학·섬유 중심의 B2B 사업 구조에서 벗어나 K-뷰티 화장품이라는 고성장 B2C 시장으로의 전략적 피벗(방향전환)을 단행했다. 동시에 이호진 회장은 애경산업 인수 과정에서 자식들인 오너 3세가 지분을 보유한 계열 투자회사를 핵심 축으로 내세우면서, 이번 딜이 '단순한 사업 확장 그 이상'의 '승계 재원 확보 통로'로 설계됐다는 분석이다.
이호진 고문은 태광그룹의 태광산업 지분 29.5%와 금융계열사 흥국생명 지분 56.3%를 보유한 최대주주다. 1세대 창업주인 이임용(1996년 타계)과 모친 이선애의 셋째아들로 태어나 1997년 2세대로서 태광그룹을 승계했다. 현재 그의 아들인 이현준이 애경산업 인수 컨소시엄에 참여한 계열 투자회사 티투프라이빗에쿼티(T2PE)의 지분 9%를 소유하고 있고. 딸인 이현나도 지분 9%를 각각 보유해 3세 승계 작업을 진행하고 있는 셈이다. 이에앞서 아들 이현준과 딸 이현나는 그룹의 주요 계열사인 티시스 지분을 각각 11.3%, 0.6%씩 보유하며 그룹에 대한 간접적인 지배력을 확보하고 있다. 그러나 그룹 전체 지배력을 강화하고, 향후 지주사 전환 및 상속 과정에서 발생할 막대한 상속세 재원을 마련하는 것이 그룹 오너십의 가장 시급한 과제 중 하나로 꼽혀왔다.
태광그룹, 산업재 중심 B2B기업서
소비자와 맞닿는 B2C기업으로 확장
태광그룹은 1950년 창업 이래 석유화학, 섬유, 직물 등 전통적인 산업재를 중심으로 국내 최초의 수직계열화를 완성한 B2B(기업 간 거래) 기업이다. 그러나 최근 몇 년간 주력 사업인 석유화학 및 섬유 산업이 경기 변동에 취약해지고 성장 정체에 직면하면서, 안정적인 현금 흐름을 넘어설 새로운 성장 동력 확보가 절실했다.
애경산업 인수는 이러한 태광그룹의 포트폴리오를 소비자와 직접 맞닿는 B2C(기업과 소비자 간 거래) 시장으로 확장하는 핵심적인 전략적 피벗이다. 국내 뷰티 업계 '3대장' 중 하나인 애경산업의 ‘AGE 20’s’, ‘루나’, ‘케라시스’ 등 강력한 생활뷰티 및 생활용품 브랜드를 확보함으로써, 태광그룹은 그룹의 성장축을 다변화하고 기존 사업의 변동성을 완화할 기반을 마련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소재 기술력 기반의 수직 계열화 시너지도 기대된다다. 태광그룹이 오랜 기간 축적해 온 석유화학 및 섬유 분야의 소재 기술력은 애경산업의 화장품 및 생활용품 핵심 원료 수급 및 R&D 과정에서 강력한 수직 계열화 시너지를 창출할 잠재력을 가지게 됐다. 또한 계열사인 태광홈쇼핑과의 유통망 결합을 통해 라이브 커머스 등 B2C 유통 효율을 높이는 방안도 모색될 수 있다.
현금부자 태광, 애경산업 인수 때
이례적인 컨소시엄 구성한 까닭은?
태광의 이번 애경산업 인수 주체는 태광산업㈜, 티투프라이빗에쿼티㈜(T2PE), 유안타인베스트먼트㈜로 구성된 컨소시엄이다. 이 구성은 태광그룹의 재무 상태를 고려할 때 매우 이례적이다. 태광산업은 5월 기준 2조 7692억 원의 유동자산을 보유하고 있으며, SK브로드밴드 지분 매각을 통해 8038억 원의 현금을 추가 확보하여 사실상 2조 원에 육박하는 순현금성 자산을 가진 '현금 부자'로 평가받는다. 차입금이 86억 원에 불과하고 부채비율이 18%로 재무 안정성이 극도로 우수하기 때문에 , 4,700억 원 규모의 애경산업 인수를 단독으로 충분히 감당할 수 있었다.
이같이 태광산업이 막대한 현금성 자산에도 불구하고 컨소시엄 구조를 택하고, 특히 계열 투자회사인 T2PE를 포함시킨 것은 재무적 필요성보다는 지배구조적 필요성이 압도적으로 크다는 것을 의미한다. T2PE는 오너 3세의 지분 승계 과정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 전략적으로 설계된 특수목적 투자 수단(SPV)으로 분석되기 때문이다.
태광이 지난해 12월 M&A를 통한 사업 재편을 위해 설립된 T2PE의 지배구조는 매우 이례적이었다. 태광산업과 티시스가 각각 41%의 지분을 소유하고 있으며, 특히 이호진 전 회장의 장남 이현준 씨와 장녀 이현나 씨가 각각 9%씩, 총 18%의 지분을 직접 보유하고 있다.
이같이 T2PE의 설립과 컨소시엄 참여를 오너 3세들의 '간접적 경영 등판'의 시작으로 해석하고 있다. T2PE가 애경산업 투자에서 성공적인 수익을 거둘 경우, 이 수익은 이현준/이현나 씨가 보유한 지분율에 따라 배당되거나 T2PE 자체의 기업 가치 상승을 통해 실현될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T2PE는 오너 3세가 향후 그룹 지주사나 핵심 계열사 지분을 매입하거나, 그룹 승계 과정에서 발생할 막대한 상속세를 납부하는 데 필요한 핵심 '승계 재원 확보 통로'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 전략적으로 설계된 금융 기반의 교두보라는 분석이다.
막대한 태광의 현금은 어디다 쓸까?
애경산업 인수후 사업확장 때 풀듯
태광이 인수할 애경산업은 화장품 매출의 약 70%를 해외에서 거두지만, 이 중 80%가 중국 시장에 집중되어 있어 지정학적 위험에 취약하다는 평가를 받아왔다.
태광그룹은 이 중국 의존도를 줄이는 것을 최우선 과제로 삼고, 확보된 자금력을 바탕으로 미국, 유럽, 동남아 등 선진 및 신흥 시장으로의 판로를 다변화하는 데 속도를 낼 것으로 보인다. 구체적인 목표도 제시됐다. 태광그룹은 2027년까지 해외 매출 비중을 총매출의 43%까지 높이고, 중국 외 지역(미국·일본·유럽 등)의 비중을 40%까지 끌어올려 시장 다변화를 완성하겠다는 구상이다.
특히 태광그룹은 애경그룹 지분 인수를 위해 시장 주가 대비 약 87%에 달하는 높은 지배권 프리미엄을 인정했다. 이는 태광그룹이 K-뷰티라는 새로운 성장 동력 확보에 대한 전략적 가치를 매우 높게 평가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 높은 프리미엄이 오직 경영권 지분에만 집중되고 소액주주 지분에는 외면되었다는 점은 향후 태광그룹이 풀어야 할 거버넌스 논란으로 작용할 수 있다. 향후 포괄적 주식 교환 등을 통한 강제 매수 옵션이 논의될 경우, 태광그룹의 주주 친화 정책에 대한 시장의 평가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태광그룹은 전통적인 B2B 제조 문화와 고도로 트렌드에 민감한 B2C 소비재 기업인 애경산업 간의 이질적인 문화를 성공적으로 통합하고, T2PE를 통한 승계 과정의 투명성을 확보하는 이중의 과제를 안게 됐다. 태광그룹의 막강한 현금력이 성공적인 글로벌 확장과 안정적인 3세 승계라는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을 수 있을지 귀추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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