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베 노선 계승, 강경 보수 정치 본격화
자민–유신 연립 합의, 긴급사태조항 2026년 제출 목표
전문가들 “권력 남용 위험…민주주의 근간 흔들 수 있어”
[포인트경제] 일본 정치사에 새로운 이정표가 세워졌다. 다카이치 사나에(高市 早苗) 자민당 총재가 21일 국회에서 제104대 총리로 지명되며 일본 최초의 여성 총리가 탄생했다. 여성 정치인이 총리직에 오른 것은 헌정 사상 처음으로, 일본 사회에 상징적 의미를 던진다. 그러나 동시에 강경 보수 성향의 정치인으로서, 아베 신조 전 총리의 노선을 계승해 나갈 것이라는 전망 속에 우려의 목소리도 높아지고 있다.
다카이치 사나에 일본 총리 지명/니혼게이자이 보도분 갈무리(포인트경제)
다카이치는 오랫동안 아베 전 총리와 정치적 궤를 같이해 온 인물로, 안보와 개헌 문제에서 한층 더 강경한 태도를 보여왔다. 자위대의 헌법 명기, 집단적 자위권 확대 등 아베 전 총리가 추진해 온 정책을 계승할 가능성이 크다. 역사 인식 문제와 대외관계에 있어서도 과거와 같은 보수적 접근을 이어갈 것으로 예상되며, 한국과 중국을 향한 혐한·혐중 정서를 자극할 수 있다는 점이 주변국의 우려를 키우고 있다.
총리 지명 직전 자민당과 일본유신회(日本維新の会)는 연립 정권 합의문을 발표했다. 중의원 의원 정수 10% 감축, 기업·단체 헌금 문제 논의, 식품 소비세 2년간 한시적 0% 검토 등이 담겼다. 하지만 가장 주목을 끈 것은 긴급사태조항 개헌 추진이다. 합의문에는 2026년까지 국회에 긴급사태조항 조문안을 제출한다는 목표가 명시됐다. 이를 위해 ‘조문기초협의회(条文起草協議会)’를 설치하고 중의원과 참의원 헌법심사회에서 구체적인 논의를 이어가도록 하는 절차도 포함됐다.
긴급사태조항이 도입되면 대규모 재해나 국가 위기 상황에서 내각이 긴급사태를 선포할 수 있게 된다. 문제는 이 경우 국회의 입법 기능이 제한되고, 내각이 법률과 같은 효력을 가진 명령을 발할 수 있다는 점이다. 국회의원 임기 연장이나 국민 기본권 제한까지 가능해질 수 있어 ‘행정 권한 집중’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지적이 끊이지 않는다. 이는 국회가 제 기능을 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행정부 권한이 강화되는 구조로, 최근 한국에서 계엄 논란이 불거진 상황과 유사하다는 분석도 제기된다.
전문가들도 강한 우려를 표한다. 일본 헌법학자 고바야시 세쓰(小林 節) 게이오대(慶應義塾大学) 명예교수는 “긴급사태조항은 국민을 지키기 위한 것이 아니라 권력을 가진 쪽이 권력을 남용하기 위한 장치가 될 수 있다”며, 개헌 추진의 본질적 위험성을 지적했다. 일본변호사연합회(日本弁護士連合会) 역시 “대규모 재해나 감염병 등에는 이미 대응할 수 있는 법률 체계가 존재한다”며, 헌법에 별도의 긴급사태조항을 신설하는 것은 불필요하고 오히려 위험하다고 경고했다. 삿포로 변호사회도 “입헌주의를 흔들고 권력 남용을 초래할 수 있다”며 저지를 촉구했다.
이 같은 논란은 일본 민주주의의 안정성과 직결된다. 헌법에 비상권력을 부여하는 조항이 들어갈 경우, 권력분립과 사법적 통제 장치가 흔들리며 국민의 권리가 쉽게 제약될 수 있다. 특히 의원 정수 축소와 맞물리면 의회의 견제력이 약화되고, 결국 내각이 국가적 위기를 명분으로 권한을 무제한적으로 행사할 수 있다는 비판이 제기된다.
다카이치 총리의 탄생은 일본 사회에 양가적인 의미를 남긴다. 여성 총리라는 역사적 성취 뒤에는 강경 보수 정치의 심화, 그리고 긴급사태조항 개헌이라는 민주주의 제도의 근간을 흔들 수 있는 변수가 놓여 있다. 다카이치 내각이 향후 어떤 정책 노선을 걸어갈지, 일본 안팎에서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포인트경제 도쿄 특파원 박진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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