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연합(EU)이 2027년 말까지 러시아산 천연가스 수입을 전면 중단하기로 했다. 우크라이나 전쟁이 시작된 후 약 3년 만에, 러시아 에너지에 대한 의존에서 완전히 벗어나겠다는 EU의 강한 의지가 드러난 셈이다. 이 결정은 유럽 에너지 시장이 큰 변화를 맞이하고 있음을 알리는 신호탄으로 받아들여진다.
현지시간 20일 룩셈부르크에서 열린 EU 에너지장관회의에서 27개 회원국이 참석한 가운데, 러시아산 가스 수입을 단계적으로 중단하는 규정안이 채택됐다. 앞으로 이 안은 유럽의회와의 협의를 거쳐 최종 법제화될 예정이고, 이르면 내년 초부터 시행 절차가 들어간다.
합의 내용에 따르면, 2026년 1월 1일부터는 러시아산 가스에 대한 신규 계약이 모두 금지된다. 이미 체결된 단기 계약은 2026년 6월 17일까지는 유지할 수 있지만 그 이후로는 자동 종료된다. 그리고 장기계약도 2027년 12월 31일까지 모두 정리해야 하며, 2028년부터는 파이프라인을 통한 가스는 물론, 액화천연가스(LNG)도 아예 들여올 수 없게 된다.
이렇게 되면 러시아산 가스는 EU 시장에서 완전히 사라지게 된다. 2022년 전쟁 전까지 EU가 수입하는 가스 중 약 45%가 러시아산이었는데, 최근에는 이 비율이 13% 수준까지 감소했다. 앞으로는 '제로'를 향해 나아가게 된다. EU가 러시아에서 들여오는 가스 규모는 연간 150억 유로, 우리 돈으로 약 25조 원에 달해, 러시아 에너지 업계에도 상당한 충격이 예상된다.
이번 표결에서는 헝가리와 슬로바키아를 제외한 25개국이 찬성하면서 안건이 통과됐다. 두 나라는 여전히 러시아산 가스에 크게 의존하고 있고, 당장 대체 공급처를 확보하기 어렵다는 이유로 반대를 표했다.
헝가리는 "우리의 에너지 안보를 위협하는 비현실적인 결정"이라며 강하게 맞섰고, 슬로바키아 역시 "당장 대안이 없다"며 반대표를 던졌다. 하지만 EU는 회원국 15곳 이상, 인구 비율 65% 이상이라는 '가중다수결' 조건을 충족해 결정을 강행했다.
이 때문에 헝가리와 슬로바키아가 향후 EU의 대러시아 제재안 표결 때 반발할 가능성도 제기된다. 실제로 두 나라는 그동안에도 러시아 제재안에 자주 반대하거나 기권한 바 있다.
이번 조치는 EU가 추진해온 '리파워EU' 전략의 핵심 단계로 꼽힌다.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EU는 이미 러시아산 석유와 석탄 수입을 중단했지만, 가스까지 전면적으로 금지하는 데는 회원국 간 이견이 컸다.
EU는 이 합의를 통해 "러시아의 에너지 무기화 시대를 끝내고, 에너지 자립을 이루겠다"고 선언했다. 집행위원회는 각국에게 러시아산 가스를 대신할 '국가 다변화 계획'을 내도록 했고, 혼합 LNG를 들여오는 경우에도 러시아산 비율을 반드시 신고하도록 했다.
전문가들은 이번 결정이 유럽 에너지 구조의 커다란 전환점이 될 것으로 보고 있다. 독일, 프랑스 등 주요국은 이미 노르웨이, 카타르, 미국 등과 LNG 장기계약을 늘리며 러시아에의 의존을 줄여오고 있다. 폴란드와 발트 3국은 이미 러시아 가스에서 완전히 벗어나, 재생에너지 확대와 에너지 인프라 투자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하지만 유럽 내부에서는 여전히 에너지 가격 상승과 공급 불안정에 대한 걱정이 남아 있다. 러시아산 가스는 상대적으로 저렴했고 공급도 안정적이었기 때문에, 새로운 공급처를 마련하는 데 상당한 비용이 수반된다.
LNG 수입 확대가 당장 실현 가능한 대안이긴 하지만, 관련 인프라를 구축하는 데는 몇 년이 걸리고 운송비용도 높다. 재생에너지를 더 빠르게 늘리자니 나라마다 속도가 제각각이어서, 실제로 전면 대체까지는 시간이 더 필요하다. 이 때문에 일부 국가는 "충분한 대체 에너지 여건이 마련된 뒤에야 전면 금지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EU는 "지정학적 독립이 더 중요하다"며 일정을 그대로 밀어붙였다.
이번 결정으로, 러시아의 에너지 외교 역시 커다란 타격을 입게 됐다. 러시아는 유럽 수출이 줄어든 만큼 중국과 인도 등 아시아 시장으로 눈을 돌리고 있지만, 운송 인프라가 따라주지 않아 단기간에 구멍을 메우기는 쉽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유럽 내에서 러시아산 에너지가 사라지면 미국산 셰일가스와 중동산 LNG의 영향력이 한층 더 커질 전망이다. 이렇게 되면 글로벌 에너지 공급 구조의 재편도 더 빨라질 가능성이 높다.
EU의 이번 결정은 미국을 비롯한 서방 동맹국에도 긍정적인 신호로 받아들여진다. 이미 미국은 유럽이 러시아산 화석연료 수입을 완전히 중단해야만 대러 제재 효과가 극대화된다고 주장해왔고, 이번 합의를 통해 미국의 입장도 사실상 관철된 셈이다.
이 조치의 여파는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 시장에도 영향을 미칠 것으로 예상된다. 유럽이 러시아산을 대신해 LNG 구매를 늘리면, 국제 LNG 가격이 다시 오를 수 있다. 그렇게 되면 국내 전력이나 산업용 가스 요금이 직접적으로 오르는 부담으로 이어질 수 있다.
전문가들은 "유럽의 러시아산 가스 퇴출은 단순히 지정학적 의미를 넘어서 에너지 시장 전체를 흔들 변화"라며 "한국도 수입처 다변화, 재생에너지 확대, 비축 강화 같은 선제적인 대응책 마련이 필요하다"고 조언하고 있다.
이번 EU 결정으로 '러시아산 가스 제로'가 본격적으로 가동되면서, 이는 단순한 제재를 넘어 유럽이 에너지 독립을 선언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앞으로 남은 2년 남짓한 기간 동안 각국이 공급망 전환에 얼마만큼 성공하느냐에 따라 앞으로의 유럽 경제와 안보 구도가 크게 달라질 전망이다.
[폴리뉴스 이상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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