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뉴스투데이 김진영 기자] 인공지능(AI) 확산으로 글로벌 반도체 산업의 중심축이 빠르게 재편되는 양상이다. AI 가속기에 필수적인 고대역폭 메모리(HBM) 수요가 급증하면서 생산 거점이 미국으로 이동하는 가운데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등 한국 반도체 기업들도 현지 투자 확대에 속도를 내고 있다. AI 시대의 경쟁력은 기술력보다 생산 거점 확보에 달렸다는 분석도 나온다.
글로벌 반도체 산업의 공급망 축이 미국을 중심으로 짜이는 분위기다. 국제반도체장비재료협회(SEMI)에 따르면 미국 내 반도체 투자 규모는 올해 210억달러(약 30조원)에서 2027년 330억달러(약 47조원)로 2년 새 120억달러(17조원)가 늘어날 전망이다. 이후 2028년 430억달러(61조원), 2030년에는 누적 1580억달러(약 225조원)에 달해 한국·중국·대만 등 아시아의 투자 규모를 넘어설 것으로 분석된다.
그동안 반도체 제조의 중심은 아시아였다. 전 세계 반도체 생산능력의 79.3%가 한국·대만·중국에 집중돼 있었다. 미국은 주로 설계 중심의 AI 반도체 시장에 참가해 왔지만, 트럼프 행정부가 ‘반도체 국산화’를 앞세워 자국 내 제조 복귀를 강하게 추진하면서 생산 거점이 빠르게 옮겨가는 분위기다. 미국 정부는 반도체지원법(CHIPS Act)을 통해 인텔에 78억6000만달러(약 11조원)를 지원하고, TSMC에도 650억달러(약 92조원) 규모의 애리조나 공장 투자를 승인했다.
AI 반도체 산업의 확산은 미국 중심 재편을 가속화하는 데 배경으로 꼽힌다. 오픈AI와 엔비디아 등 미국 빅테크 기업들이 초대형 데이터센터 구축을 추진하면서 AI 반도체 공급망의 지역 집중이 불가피해졌기 때문이다. 오픈AI와 오라클이 미국 전역에서 약 5000억달러(약 700조원)를 투입해 추진 중인 초대형 데이터센터 사업 ‘스타게이트(Stargate)’는 이 같은 판도 변화의 상징으로 평가된다.
글로벌 반도체 산업의 주도권은 기술 경쟁에서 생산 거점 경쟁으로 옮겨가는 추세다. AI 가속기의 핵심 부품인 HBM 수요가 급증하면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등 한국 반도체 기업들도 미국 내 현지 생산 기반 확보에 속도를 내고 있다. 앞서 오픈AI는 ‘스타게이트’ 프로젝트에 필요한 HBM 수요가 전 세계 생산량의 두 배에 이를 것으로 보고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를 주요 공급 파트너로 지정했다.
GPU와 HBM을 결합하는 첨단 패키징(Advanced Packaging) 과정은 AI 반도체에서 주요 공정으로 자리 잡았다. 이 과정은 설계·공정 간 동시 협업 비중이 커 수요처와의 근접성이 리드타임과 품질 안정에 유리하다는 평가가 많다. 엔비디아가 미국 내 패키징 파트너십을 확대하는 등 미국 중심의 공급망 강화 움직임도 가시화되고 있다.
먼저 삼성전자는 2026년 가동을 목표로 텍사스주 테일러 공장에 약 52조원을 투입, 차세대 반도체 생산망을 재편하고 있다. 이곳에서는 4나노 이하 첨단 공정을 운영하고 2나노 공정을 적용해 테슬라 차세대 AI 칩 ‘AI6’을 생산할 예정이다.
지난 7월 테슬라와 약 22조8000억원 규모의 파운드리 계약을 체결한 삼성은 현재 현지 엔지니어 투입을 통해 공정 안정화 작업을 진행 중이다. 현재 한국에서도 4나노 이하 공정을 가동 중이지만, 향후 미국 내 첨단 공정 생산 비중을 높일 가능성도 제기된다.
이종환 상명대 시스템반도체학과 교수는 “엔비디아의 최신 칩이 미국 본토에서 생산된다는 것은 다른 글로벌 빅테크들의 생산 수요도 현지로 이동할 가능성을 시사한다”며 “TSMC가 이미 공장 가동 계획을 밝힌 만큼 삼성전자 역시 테일러 공장의 속도를 높일 필요가 있다”고 설명했다.
SK하이닉스도 지난해 4월 약 5조4000억원을 투자해 인디애나주 웨스트라피엣(WSL)에 AI 메모리용 어드밴스드 첨단 패키징 공장 건설을 확정했다. 최근 트럼프 행정부가 반도체 품목별 관세 부과 방침을 두고 수차례 수정·조정을 반복하는 상황에서, 국내 생산 후 미국으로 직접 수출해야 하는 HBM 제품이 관세 영향을 받을 가능성도 거론된다.
웨스트래피엣 공장은 이런 리스크를 완화하는 동시에 애리조나주에 조성 중인 TSMC 파운드리 단지에 안정적으로 HBM을 공급하는 거점 역할을 맡게 될 것으로 예측된다. SK하이닉스는 2028년 하반기부터 HBM 등 고성능 메모리의 패키징과 테스트 공정을 현지에서 수행할 계획이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미국 현지 투자가 실제 성과로 이어지기 위해선 정부 지원 역할도 중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당장 관세와 보조금 등 통상 현안이 남아 있는 데다, 한미 양국 간 반도체 공급망 협력 체계가 아직 완전히 정착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미국 정부가 반도체 품목별 관세 부과 방침을 두고 잇따라 입장을 바꾸는 가운데 기업 투자 계획에도 불확실성이 커지고 있다.
한미 양국은 이달 말 경주에서 열리는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를 앞두고 반도체·통상 의제를 포함한 양자 협의를 진행 중이다. 업계는 이번 회의에서 관세와 보조금 등 핵심 현안의 윤곽이 드러나야 한국 반도체 기업들의 미국 현지 투자가 본궤도에 오를 것으로 보고 있다.
한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AI 반도체는 설계와 패키징이 동시에 이뤄져야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다”며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모두 미국 현지 공장을 중심으로 고객사와의 공동개발 체계를 강화할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이어 “막대한 비용 부담에도 불구하고 미국 투자는 피할 수 없는 선택”이라고 덧붙였다.
그는 “AI 생태계의 중심이 점차 미국으로 이동 중인 만큼 현지 생산 기반을 확보하지 못하면 글로벌 경쟁에서 뒤처질 수밖에 없다”며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행보는 미국 내 HBM 공급망을 완성하는 분기점이 될 것”이라고 해석했다. 그러면서 “양사가 구축 중인 ‘AI 생산 동맹’이 향후 글로벌 공급망의 새로운 표준으로 자리 잡을 가능성이 크다”고 내다봤다.
Copyright ⓒ 이뉴스투데이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본 콘텐츠는 뉴스픽 파트너스에서 공유된 콘텐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