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고율 관세 강화로 수출길이 좁아지자 한국 정부가 '유럽 시장'으로 눈을 돌렸다. 미국 의존도를 줄이고 새로운 수출 활로를 찾기 위한 대응이지만 이미 수년 전부터 유럽 네트워크를 공고히 해온 일본과 중국에 비해 한국의 준비는 한참 늦었다는 지적이 나온다. 재계 안팎에선 체계적 지원과 대관 외교 강화가 시급하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19일 강훈식 대통령 비서실장이 '전략경제협력 대통령 특사' 자격으로 유럽 출장에 나섰다. 강 비서실장은 이번 출장을 통해 방위 산업을 중심으로 국내 기업의 수주전을 지원할 계획이다. 강 비서실장은 "유럽 시장의 막강한 강대국들과 경쟁하기 위해 나간다"며 "국부 창출에 조금이라도 기여하겠다는 마음으로 출장을 마치고 돌아오겠다"고 강조했다.
유럽은 미국의 관세 정책으로 수출길이 막힌 상황에서 핵심 대체시장으로 평가받는 지역이다. 이번 정부 특사 파견 역시 미국을 대체할 새 시장을 모색하는 행보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유럽연합에 소속된 국가 총인구는 지난해 기준 약 4억5000만명으로 미국(약 3억4120만 명)을 앞선다. 지난해 기준 유럽연합의 수입 규모는 약 3980조원으로 미국(약 4680조원)보다는 다소 적으나 절대적인 규모는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다. 경제성장률은 신흥국 대비 느린 편이지만 회원 국가 상당수가 이미 선진국에 속해 있어 경제력 측면에선 미국과 중국에 이어 높은 수준이다.
유럽 내에서 한국의 경제적 영향력은 경쟁국과 비교해 상대적으로 뒤처진다. 유럽연합 통계청(Eurostat)에 따르면 금액 기준 유럽연합의 최대 수입국은 중국으로 전체 수입의 21.3%를 차지했다. 뒤를 이어 미국 13.7%, 영국 6.8%, 스위스 5.6%, 일본 2.9% 그리고 한국 2.8% 순이다. 글로벌 선진국 가운데 한국의 비중은 낮은 편에 속한다.
더 큰 문제는 성장 추세다. 경쟁국들의 유럽 수출 비중은 큰 폭으로 증가하는 반면 한국은 유독 부진한 양상을 보이고 있다. 지난해 한국의 대유럽 수출액은 전년 대비 7.5% 감소했다. 반면 일본과 중국은 각각 4.5%와 4.6% 증가했다. 미국 역시 5.6% 수출액이 늘어났다. 재계에서는 한국 기업의 유럽 수출 저하 원인으로 정부 지원의 부재를 지목하고 있다. 경쟁국들은 오래전부터 유럽연합을 상대로 한 대관 활동에 공을 들여온 반면 국내 기관은 유럽연합 네트워크 구축에 소극적인 모습을 보여왔기 때문이다.
유럽연합 의회 투명성 보고서에 따르면 유럽에 진출한 국내 경제협의체 및 정부 기관은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KOTRA) △유럽상공회의소 △한국무역협회 △한국경제인협회 등 총 22곳으로 집계됐다. 이 가운데 지난해까지 꾸준히 유럽연합 의회에서 대관 활동을 펼친 기관은 한국경제인협회가 유일했다. 한국경제인협회는 지난해 기준 50만 유로(약 8억3000만원)를 유럽연합 대상 대관활동에 투입한 것으로 확인됐다. 정부 기관인 KOTRA는 2018년 이후 대관 활동을 중단한 상태다.
반면 중국은 총 36개 기관이 목록에 등록돼 있고 이 가운데 △중국 국제상공회의소 △중국 유럽연합상공회의소 △중국 경제연구소 △중국 비즈니스 협회 등 4개 기관이 유럽연합을 대상으로 대관활동을 펼치고 있다. 중국 기관들이 지난해 사용한 총 로비 금액은 340만유로(약 56억원)에 달했다.
일본 역시 36개 기관 중 6개 기관이 유럽연합에서 대관활동을 벌이고 있다. 유럽연합에서 활동 중인 대표적 일본 경제기관으로는 △일본 기업협의회 △일본 기계무역투자센터 △일본 경제연맹 △일본 국제화센터 △일본 기업협회 등이다. 이들 기관이 지난해 투입한 로비 금액은 155만 유로(약 25억7000만원)로 집계됐다. 중국과 일본 모두 한국에 비해 세 배 이상 많은 자금을 유럽연합 대관 업무에 사용한 셈이다.
산업계에서는 경쟁국과 격차를 줄이기 위해 정부 차원의 지원이 필요하단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재계 관계자는 "미국 시장의 불확실성이 어느 때보다 커진 지금 유럽만큼 빠르게 미국을 대체할 수 있는 지역은 드물다"며 "그런데 유럽 현지 경제계와의 네트워크 형성이 경쟁국에 뒤처진다면 다양한 분야에서 국내 기업이 불이익을 받을 수 있다"고 우려를 표했다.
전문가들 또한 유럽시장 개척을 위해 국가적 지원이 동원돼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김대종 세종대학교 경영학과 교수는 "트럼프 대통령의 자국 우선주의로 미국 시장의 문턱이 높아진 상황에서 가능한 한 많은 대체 시장을 확보해야 한다"며 "유럽연합는 미국 다음가는 경제 대국들이 밀집한 지역인 만큼 정부 차원의 전략적 공략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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