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중 간 기술 패권 경쟁이 한층 치열해지면서 반도체와 첨단 산업에 꼭 필요한 핵심 소재인 '갈륨'의 국내 생산에 한국 기업들이 본격적으로 뛰어들고 있다. 고려아연은 세계 시장을 사실상 독점하고 있는 중국의 공급망 장악에 맞서 갈륨 생산 시설을 직접 구축하기로 하며 글로벌 자원 안보 경쟁에 새로운 변수로 떠올랐다.
고려아연은 울산 온산제련소에 갈륨 회수 공정을 새로 도입하기로 하고, 오는 2027년 12월 완공을 목표로 약 557억원을 투자한다고 20일 밝혔다. 새로 짓는 공장은 2028년 상반기 시운전을 거쳐 본격적으로 운영되며, 연간 약 15.5톤의 갈륨을 생산할 예정이다. 이 생산량은 연 110억 원가량의 수익으로 이어질 전망이다.
고려아연 관계자는 "자체 기술로 고순도 갈륨 회수 공정을 상용화하고 효율성도 높여서 초기 투자비를 크게 낮출 수 있었다"며 "최근 갈륨 가격이 계속 오르는 추세라 앞으로 수익성은 더 커질 것"이라고 설명했다.
갈륨은 반도체, 태양광 패널, 고성능 통신장비, 레이저, LED, 야간 투시장비 등 첨단 산업에 폭넓게 쓰인다. 중요성이 크다 보니 우리 정부는 '자원안보특별법'에서 지정한 33종의 핵심 광물 가운데 하나로 갈륨을 포함했고, 미국도 전략적으로 관리 대상에 올려놓았다.
하지만 세계 갈륨 시장은 중국이 거의 독점하고 있다. 지난해만 해도 전 세계 갈륨 생산량 762톤 중 98.7%를 중국이 차지했으며, 우리나라의 갈륨 수입도 70% 이상이 중국에 의존하고 있는 실정이다.
문제는 중국이 이 '희귀 금속'을 무역전쟁의 카드로 활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중국은 2023년부터 갈륨과 게르마늄의 수출을 통제하기 시작했고, 지난해 말에는 미국으로의 수출을 아예 전면 차단했다. 이 여파로 갈륨 가격은 빠르게 뛰어올랐다. 런던 금속거래소 집계만 봐도 2023년 6월 말 1kg에 257.5달러 수준이던 가격이 올해 6월에는 782.5달러, 또 지난 17일엔 1,112.5달러를 넘었다. 불과 2년 만에 네 배 넘게 뛴 셈이다.
이처럼 가격이 급등하면서 반도체, 에너지, 국방 등 갈륨을 필요로 하는 산업 전반에 부담이 커졌다. 이런 상황에서 고려아연의 생산 결정이 더욱 주목받고 있다. 업계 관계자들은 "중국이 전략 광물을 무기로 삼는 상황에서, 고려아연의 갈륨 생산이 국내 산업만이 아니라 글로벌 공급망 안정에도 긍정적인 신호로 작용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여기에 이번 갈륨 생산 공정에서는 '보너스'도 있다. 공정 부산물로 연간 16톤 이상의 인듐을 추가로 확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인듐도 반도체, 태양광, 디스플레이 등 첨단 산업에 꼭 필요한 희귀 금속이고, 최근 5년 새 가격이 거의 두 배 가까이 올랐다.
고려아연은 이미 전 세계 인듐 수요의 약 11%를 담당하고 있으며, 중국을 제외하면 세계 최대 생산업체이기도 하다. 지난해 약 150톤을 생산한 데다, 이번 갈륨 공정 도입으로 생산량이 더 늘어나게 됐다.
아울러 고려아연은 게르마늄 생산 공장도 2028년까지 온산제련소에 짓는 중이다. 지난해 8월, 최윤범 회장은 한미 정상회담에 경제사절단 자격으로 참석해, 세계 최대 방산기업 록히드마틴과 게르마늄 공급 및 핵심 광물 협력에 관한 양해각서를 맺으면서 국제 협력의 발판도 마련했다. 게르마늄은 적외선 광학장비, 태양광 전지, 5G 장비 등에 들어가는 주요 소재이지만, 특히 중국 의존도가 높은 대표적 광물이다.
결국 고려아연은 갈륨, 게르마늄, 인듐으로 이어지는 전략 광물 삼각축을 탄탄히 다지며, 한국이 중국 의존에서 벗어날 새로운 동력으로 떠오르고 있다.
이번 투자는 단순히 생산을 늘린다는 차원을 넘어, 자원주권 회복이라는 국가적 의미도 담는다. 최근 미국과 유럽연합은 공급망에서 중국 의존도를 낮추겠다는 목표 아래 희귀 금속 개발과 동맹 협력을 강화하는 등 전 세계적으로 핵심 광물 확보 전쟁이 갈수록 뜨거워지고 있다.
한국은 지난 7월 '핵심광물 공급망 강화 전략'을 발표하면서 2030년까지 해외 의존도를 50% 이하로 낮추겠다는 목표를 내놓았다. 산업통상자원부는 이번 고려아연의 투자를 "민간의 기술력과 자본이 결합된 자원안보 실천 모델"이라고 평가했다.
고려아연 관계자는 "중국의 수출 통제와 글로벌 공급망 불안이 길어지면서, 이제 각국이 자원 확보를 안보의 핵심 전략으로 삼고 있다"며, "온산제련소를 국내에서 유일한 전략 광물 허브로 키워 기술 자립도를 높이고, 글로벌 시장에서도 한국이 안정적으로 자원을 공급할 수 있는 나라로 자리 잡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폴리뉴스 이상명 기자]
Copyright ⓒ 폴리뉴스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본 콘텐츠는 뉴스픽 파트너스에서 공유된 콘텐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