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EONEWS=이재훈 대표기자] 2025년 10월. 마침내 '현대가 3세' 정기선(43) 부회장이 HD현대 회장직에 올랐다. 2009년 1월 재무팀 대리로 입사한 지 15년 9개월 만이다. 고(故) 정주영 명예회장의 손자이자, 지주사 HD현대의 최대주주(26.6%)인 정몽준 아산재단 이사장의 장남. 그의 승진은 '예정된 수순'이었지만, 그가 걸어온 길은 '꽃길'만은 아니었다. 'HD현대 3.0'을 선포한 정기선 호(號)의 출범을 바라보는 재계의 시선은 정확히 두 갈래로 나뉜다. '디지털과 에너지'라는 미래 비전을 제시한 '준비된 혁신가'라는 환호와, '아버지의 견고한 성' 안에서 이뤄진 '황태자의 대관식'일 뿐이라는 냉소가 교차한다. 시장은 냉정하다. 정기선 회장은 이제 '정주영의 손자와 '정몽준의 아들'이라는 꼬리표를 떼고, 오직 '숫자'와 '성과'로 자신의 가치를 증명해야 하는 마지막 시험대에 올랐다. CEONEWS는 'HD현대 3.0'이라는 거대 선박의 키를 잡은 정기선 회장의 15년 궤적을 '팩트'와 '데이터'에 기반해 냉철하게 해부한다.
■'로열 엘리트'의 교과서 '15년의 승계 수업'
정기선 회장의 이력서는 '범(凡)현대가 3세'의 전형적인 엘리트 코스를 따른다. 1982년생. 정기선 회장의 탄생은 그 자체로 '뉴스'였다. 현대그룹 창업주 고(故) 정주영 명예회장의 6남인 정몽준 이사장의 장남. 그는 태어나는 순간부터 거대 그룹의 후계자로 지목됐다. 대일외고와 연세대 경제학과(97학번)를 졸업하고 ROTC(학군장교)로 군 복무를 마쳤다. 그의 첫 사회생활은 의외로 '언론'이었다. 2005년 동아일보 기자로 1년간 재직했다. 하지만 재계는 이를 '경영 승계를 위한 정무 감각 훈련'으로 해석했다. 이후 미국 스탠퍼드 대학교에서 MBA(경영학석사)를 마친 그는 2009년 1월, 현대중공업 재무팀 대리로 입사하며 본격적인 승계 수업을 시작한다. 그러나 1년 만에 돌연 사표를 내고 미국 보스턴컨설팅그룹(BCG)으로 향한다. 그룹이 가장 힘든 시기(조선업 불황)에 자리를 비웠다는 비판이 따랐지만, HD현대 측은 "선진 경영 기법을 배우기 위한 과정"이었다고 설명한다.
2013년, 그는 '경영기획팀 수석부장'이라는 직함을 달고 화려하게 복귀한다. 이때부터 그의 승진은 '초고속 엘리베이터'였다. 1년 만인 2014년 상무, 2015년 전무, 2017년 부사장, 2021년 사장으로 고속 승진을 거듭한 후 2025년 마침내 43세의 젊은 나이에 회장에 올랐다. 입사 15년만이다. 일반 직원이 임원으로 승진하는 데 평균 20년 이상 걸리는 것을 감안하면, '황태자'가 아니면 불가능한 속도였다. 그는 그룹의 핵심인 선박영업(조선) 부문과 미래전략(기획) 부문을 동시에 총괄하며 그룹 장악력을 키워나갔다. 이 시기, 정 회장은 '아버지의 그늘'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색깔을 내려 애썼다.
■'실패'라는 쓴 약, 야심찬 '빅딜'의 좌초
정기선 회장의 경영 능력이 대중 앞에 처음으로 '공개 검증'된 사건은 2019년 시작된 '대우조선해양(現 한화오션) 인수전'이었다. 당시 부사장이었던 그는 그룹의 미래전략을 총괄하며 이 '메가딜'을 사실상 진두지휘했다. 명분은 '한국 조선업의 글로벌 초격차'였다. 성공했다면, 그는 단숨에 '승계 자격'을 증명하며 화려하게 등극했을 것이다. 그러나 2022년 1월, 유럽연합(EU) 집행위원회는 "LNG 운반선 시장의 독점을 초래할 것"이라며 두 기업의 결합을 최종 불승인했다. 3년간 공들인 빅딜이 물거품이 되는 순간이었다. 이는 정기선 회장이 경영 전면에 나선 이후 겪은 '첫 번째이자 가장 뼈아픈 공개적 실패'였다. 시장은 '글로벌 규제 당국의 흐름을 읽지 못한 미숙함'이라며 그의 리더십에 심각한 물음표를 던졌다. 이 실패는 그에게 '황태자'라는 타이틀이 얼마나 무거운지 깨닫게 한 '혹독한 신고식'이었다.
■M&A와 신사업으로 성공 반전
대우조선 M&A 실패로 위축될 법도 했지만, 정 회장은 오히려 '반전 카드'를 꺼내 들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대우조선 M&A가 좌초되기 직전인 2021년 8월, 그는 또 다른 '빅딜'을 성사시켰다. 바로 '두산인프라코어(現 HD현대인프라코어)' 인수다. 조선업에 편중된 그룹 포트폴리오를 다각화하기 위한 승부수였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인수 당시 적자였던 HD현대인프라코어는 2023년 매출 4조 7528억 원, 영업이익 4183억 원이라는 사상 최대 실적을 기록했다. 2024년에도 호실적을 이어가며 그룹의 확실한 '캐시카우'로 자리 잡았다. '실패한 M&A'의 오명을 '성공한 M&A'의 실적으로 깨끗이 씻어낸 것이다.
특히 정기선 회장은 '무거운 굴뚝 산업'의 이미지를 벗기 위해 'CES'(세계가전전시회)를 자신의 무대로 삼았다. 그는 매년 초 미국 라스베이거스 CES에 직접 등판해 유창한 영어로 그룹의 미래 비전을 발표했다. 정 회장이 꺼내든 첫 번째 카드는 '디지털 전환(DT)'이었다. 그는 "이제 배를 '만드는' 회사가 아니라, 배의 '데이터'를 파는 회사가 되어야 한다"고 선언했다. 그의 파트너는 미국 빅데이터 기업 '팔란티어 테크놀로지(Palantir)'였다. 2022년, 그는 팔란티어와 손잡고 조선소 전체 공정에 데이터 플랫폼을 구축하는 'FOS(Future of Shipyard)' 프로젝트를 가동했다. 이는 단순한 공정 개선이 아니라, '스마트 조선소'로의 완전한 변신을 의미했다. 또한, 자율운항 솔루션 전문 자회사 '아비커스(Avikus)'를 설립, 세계 최초로 대형 선박의 태평양 횡단 자율운항에 성공하며 시장을 선점했다. 이는 '정몽준의 조선소'를 '정기선의 테크 기업'으로 바꾸려는 야심의 발로였다.
정 회장의 두 번째 승부수는 '수소(H2)'였다. 그는 HD현대를 '에너지 기업'으로 재정의했다. HD현대오일뱅크의 주유소를 '수소 충전소'로 바꾸는 것부터 시작해, 그룹의 핵심 역량을 총동원한 '수소 드림(H2 Dream)' 프로젝트를 가동했다. 그의 비전은 '생산-운송-활용'에 이르는 수소 밸류체인 전체를 장악하는 것이다. 해상에서 그린수소를 생산하고, 이를 HD현대가 만든 암모니아 운반선으로 실어 나르며, 육상에서는 HD현대인프라코어의 수소 엔진 굴착기가 일하고, HD현대일렉트릭이 구축한 수소 충전소에서 에너지를 공급받는 거대한 청사진이다. 이는 정주영의 '조선입국', 정몽준의 '해양강국'을 넘어, 정기선이 제시하는 '친환경 에너지 패권'이라는 'HD현대 3.0'의 핵심이다.
■정기선 3.0의 명암 '진짜 시험은 지금부터'
2025년 10월, '정기선 회장'이라는 공식 직함을 단 그 앞에는 3개의 거대한 파도가 놓여있다.
첫째, '실력'을 숫자로 증명해야 한다. 수소, AI, 자율운항은 모두 '미래'에 대한 투자다. 당장의 '돈'이 되는 사업이라기보다는 '꿈'에 가깝다. 시장은 냉정하다. 그가 그린 청사진이 '실적'이라는 숫자로 증명되지 않는다면, 'HD현대 3.0'은 공허한 구호에 그칠 수 있다. 둘째, '진짜 위기'는 지금부터다. 미중 패권 경쟁, 글로벌 경기 침체, 에너지 전환의 불확실성 등 외부 환경은 최악으로 치닫고 있다. 조선업 '슈퍼 사이클'이 꺾이는 순간, 그의 '신사업'이 그룹 전체를 먹여 살릴 수 있을지 의문이다. '아버지' 정몽준 이사장이 여전히 최대주주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상황에서, 그가 '온전한 자기 경영'을 하고 있다고 보기도 어렵다. 셋째, '세습' 꼬리표를 떼야 한다. 그가 아무리 뛰어난 성과를 내도, '아버지 덕'이라는 평가는 그를 평생 따라다닐 것이다. 이 꼬리표를 떼는 유일한 방법은, 그의 할아버지 '정주영'이 그랬던 것처럼,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을 개척해 압도적인 성공을 거두는 것뿐이다.
'HD현대 3.0'이라는 거대 선박은 이제 막 '정기선'이라는 신임 선장과 함께 출항했다. 그는 '대우조선 M&A 실패'라는 값비싼 수업료를 냈고, '수소'와 'AI'라는 새로운 항로를 설정했다. 과연 그는 '정주영의 야성'과 '정몽준의 지성'을 뛰어넘어, 자신만의 '현대'를 창조할 수 있을까? 시장은 지금, 정기선 회장이 '위대한 창업주의 손자'로 기억될 것인지, 아니면 'HD현대 3.0 시대를 연 진정한 혁신가'로 기록될 것인지, 숨죽여 지켜보고 있다. 그의 진짜 리더십은 바로 오늘, 2025년 10월부터다. 시장의 시계는 이미 카운트다운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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