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카이스트 원자력공학박사 출신으로 현대중공업에서 수년간 탄소 규제 전략 로드맵·기술 개발을 이끌었던 함진기 글래스돔 대표는 “탄소 규제는 이제 선택이 아닌 생존의 문제”라며 “수출형 제조기업이 대응 시스템을 갖추지 못하면 시장에서 퇴출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함 대표는 현대중공업 R&D센터·에너지 부문 연구실장 시절, 유럽의 국제해사기구(IMO) 탄소 규제에 대응하는 선박 기술 전략을 수립하던 중 기후 산업의 본질적 변화를 체감했다. 그는 “자동차·배터리의 환경 규제가 조선으로 확산되는 과정을 직접 보며, 기술이 아니라 ‘규제’가 산업의 방향을 결정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회상했다.
유럽은 이미 5년 전부터 탄소 발자국, 재활용 비율, 디지털 제품 여권(DPP) 같은 제도를 설계해 기술을 그 틀에 맞춰가고 있다. 함 대표는 “결국 기업이 살아남으려면 이 규제의 언어를 이해해야 한다”며 2022년 글래스돔 코리아 대표로 합류했다. 단순한 환경·사회·지배구조(ESG) 컨설팅을 넘어, 데이터 기반 탄소관리 플랫폼 구축이라는 새로운 산업 모델에 도전장을 낸 것이다.
◇ “탄소 발자국의 80%는 부품 단계서 발생”
글래스돔은 현재 KGM(구 쌍용차), 삼성전기 등과 잇따라 계약을 맺으며 산업 전반으로 확장 중이다. 단순히 대기업 본사 컨설팅에 머물지 않고, 1차 협력사 및 그 아래 공급망까지 솔루션이 확산되도록 설계된 점이 특징이다.
함 대표는 “글로벌 완성차나 전자기업들은 자체 시스템으로 탄소 데이터를 관리하지만, 제품 전체 탄소 발자국의 80%는 부품 단계에서 발생한다”며 “하청망이 포함되지 않으면 정확한 탄소 데이터를 얻을 수 없다”고 설명했다. 실제로 유럽 자동차 제조사들은 협력사에 “자체 인증기관이 아닌 글로벌 인증기관의 탄소 검증서를 제출하라”고 요구하고 있다. 그는 “이 구조에 대응하려면, 부품사까지 연결되는 ‘수직적 데이터 체계’가 필수”라고 했다.
글래스돔의 차별점은 ‘공정 엔지니어링 기반의 데이터 솔루션’이다. 함 대표는 “단순 소프트웨어 기업이 아닌, 전주기 환경영향평가(LCA) 전문가·MES 엔지니어·데이터 사이언티스트가 한 조직 안에 있다”며 “컨설팅과 개발을 분리하는 타사와 달리 원스톱 구조로 빠르게 규제 대응이 가능하다”고 설명했다.
이 시스템은 규제 변화에 맞춰 연 구독형 서비스형 소프트웨어(SaaS) 형태로 지속 업데이트된다. 함 대표는 “대부분의 소프트웨어는 한 번 깔면 끝나지만, 우리는 규제나 OEM 요구사항이 바뀔 때마다 실시간 업데이트한다”며 “중소기업 입장에서는 한 명의 인건비 수준 비용으로 규제 대응을 외주화할 수 있어 수요가 급증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 “탄소 규제는 새로운 무역장벽이자 산업 표준”
글래스돔은 한국을 비롯해 유럽, 베트남, 일본 등으로 활동 무대를 넓히고 있다. 유럽에는 현지 규제 대응을 위한 법인을 신설했으며, 배터리 규제·DPP 대응 솔루션 개발에 속도를 내고 있다. 함 대표는 “유럽의 배터리 규제와 디지털 제품 여권은 2027년부터 본격 시행되며, D등급 이하 제품은 시장에서 퇴출될 수도 있다”고 말했다.
그는 “미국은 아직 실용주의 노선을 걷지만, 글로벌 대기업들이 자체 기준을 강화하면서 결국 같은 흐름으로 갈 것”이라며 “탄소 규제는 새로운 무역장벽이자 산업 표준이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이어 “기후테크는 반도체 이후 한국 제조업의 생존을 좌우할 메가트렌드가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글래스돔은 기술력과 성장 가능성을 인정받아 투자 혹한기에도 자금 유치에 성공한 드문 기후테크 기업이다.
2023년 5월까지 시리즈A 단계에서 총 860만달러(약 113억원)를 조달했고, 같은 해 10월에는 SK㈜의 후속 투자까지 이끌어냈다. 사제파트너스, 에이티넘인베스트먼트, 두나무앤파트너스, 롯데벤처스, 뮤렉스파트너스 등이 주요 투자자로 참여했다.
초기 엔젤 투자자였던 사제파트너스와는 여전히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함 대표는 “재무적 투자자(FI) 성격으로 투자받았지만, 실제로는 전략적 투자자처럼 대기업 연결과 사업 네트워크 지원을 받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단기적인 자금 유치보다 매출 기반으로 몸값을 높이는 전략에 집중하고 있다”며 “내년 상반기 손익분기점(BEP)을 달성한 뒤 3~4년 내 상장을 목표로 하고 있다”고 밝혔다.
함 대표는 올해 대통령 직속 탄소중립·녹색성장위원회 2기 위원으로 위촉됐다. 그는 “중소기업들이 규제의 파고를 넘을 수 있도록 정부와 산업계가 함께 지원 구조를 세워야 한다”며 “기후테크는 더 이상 환경기업의 영역이 아닌 제조·수출의 필수 인프라”라고 말했다.
마지막으로 그는 “한 분야만 파는 것보다 기술과 산업을 폭넓게 이해해야 한다”며 “기본기를 갖춘 인재들이 이 시장의 미래를 이끌 것”이라고 조언했다.
Copyright ⓒ 이데일리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본 콘텐츠는 뉴스픽 파트너스에서 공유된 콘텐츠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