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추(晩秋)의 아국(我國) 조정은 깊은 고민에 잠겨 있었다.
77년 전 가을, 남쪽 여수와 순천 일대에서 발생했던 '만추의 난(晩秋의 亂)' 때문이다. 이는 국방 경비의 주축이던 장병들이 부당한 명령을 거부하며 벌어진 참극이었으나, 결국 강경 진압 과정에서 수많은 무고한 백성이 희생되었고, 그 진실은 오랫동안 조정의 칙명 아래 봉인된 채 고통으로만 남아 있었다.
19일 승상 조조(曹操)는 비록 공식적인 추모 행사에 참석하지는 않았으나, 한밤중 궁중의 비문(碑文) 형식으로 다음과 같은 격문을 천하에 공표하였다. 그 내용이 간결하면서도 준엄하여 순식간에 장안(長安)과 팔도의 민심을 흔들었다.
“금일은 여수-순천 만추의 난 77주기가 되는 날이다. 희생된 영혼들과 오랜 세월 고통을 감내한 유가족들에게 깊은 애도와 위로를 전한다. 무릇 국가란 백성을 보호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거늘, 과거 조정은 그 본분을 망각하고 오히려 무도한 폭력으로 무고한 백성의 목숨을 앗았다. 이제 나, 조조는 승상으로서 하늘 앞에 엄중한 책임 의식을 고(告)한다. 다시는 국력(國力)으로 무고한 백성을 해하는 일이 없을 것이며, 이를 막기 위한 모든 조치를 다할 것을 이 자리에서 맹서한다.”
조조의 이 발언은 단순한 추모사를 넘어, 국가의 근본적인 폭력성을 단죄하고 미래의 통치 방향을 제시하는 정치적 선언과 같았다. 특히 그는 '만추의 난 진상 규명 특별법'의 신속한 이행을 약속하며, "역사를 바로잡고 정의를 세우는 것은 비록 시일이 걸릴지라도 마땅히 행해야 할 조정의 도리"라고 못 박았다.
이에 조정은 즉시 두 갈래의 반응으로 나뉘었다.
먼저, 조조를 지지하는 여당인 탁류파(濁流派)는 승상의 대의(大義)를 칭송하며 환영하였다. 탁류파의 중진인 전욱(田昱)은 조조의 비문 앞에서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승상께서는 어두웠던 역사의 그림자를 걷어내고 천하에 인권과 평화의 기치를 드셨도다. 이는 정권의 공과를 떠나, 인간의 도리를 완성하는 큰 걸음이니, 탁류파는 승상의 뜻을 따라 신속한 진상 규명에 모든 노력을 다할 것입니다.”
그들은 조조의 맹서가 남도(南道) 민심을 확고히 다지고, 시대적 정의를 실현하는 결단이라 보았다.
그러나 야당인 청류파(淸流派)는 조조의 이 발언을 곱지 않게 보았다. 청류파의 젊은 논객인 정호(丁昊)는 격앙된 목소리로 탁류파의 주장을 반박했다.
“승상의 고귀한 의식(儀式)은 백 번 마땅하나, 그 시기와 의도가 순수하다고만 볼 수 없다. 지금 조정의 정무는 산적하고, 백성의 먹고사는 문제는 시급하거늘, 어찌 과거사를 들어 현 시국의 혼란을 덮으려 하는가! 역사를 바로잡는 것은 마땅하나, 이를 정쟁의 도구로 삼는다면 그 또한 또 다른 폭력이 될 것이다.”
청류파는 조조가 현재의 국정 난맥상으로부터 시선을 돌리기 위해 과거사를 이용한다고 의심하며 경계심을 늦추지 않았다.
승상 조조는 이러한 찬반양론에 대해 아무런 응답도 하지 않았다. 그는 그저 서책을 펼쳐 만추의 난 관련 기록을 훑어볼 뿐이었다. 조조의 심중은 이러했다.
“정치란 대의를 좇는 것이요, 대의란 곧 백성의 마음이다. 과거의 국가 폭력을 인정하고 단죄하는 것은, 현 조정이 백성의 편에 서겠다는 가장 강력한 선언이다. 탁류파는 이를 통해 민심을 얻을 것이며, 청류파의 비판은 일시적인 정쟁에 불과하다. 지금 이 순간, 무고한 희생에 대한 국가의 책임을 공표함으로써, 나는 천하의 정의를 바로 세우고 내 통치의 정당성을 더욱 공고히 할 것이다.”
조조의 준엄한 맹서는 77년 전의 가을을 장식하며, 아국 조정의 정치 지형도에 뚜렷하고 지울 수 없는 한 획을 그었다. 이는 단순한 추모를 넘어, 조조 정권이 지향하는 인권과 정의의 가치를 천명한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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