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 저물고 찬 바람이 들기 시작하면 강원 철원 평야의 하늘은 유난히 고요해진다. 그 고요를 깨는 소리가 들린다. 멀리 시베리아에서 2000㎞ 넘게 날아온 재두루미 무리가 한반도 하늘을 가르며 내려앉는다. 논은 이미 추수가 끝나 짚단이 말라 있고, 그 위로 회색빛 날개를 가진 새들이 긴 다리를 뻗으며 천천히 걸어 들어온다.
어린 새는 머리에 회색 솜털이 남아 있고, 성체는 붉은 눈가와 회색 등, 검은 날개깃이 뚜렷하다. 재두루미의 등장은 한겨울을 앞둔 농촌 풍경 속 가장 생생한 생명의 신호다. 이들은 겨울 동안 이곳에서 낙곡을 주워 먹고, 포근한 습지에서 잠을 자며 해마다 같은 곳으로 돌아온다.
올해 첫 무리가 관찰된 것은 10월 중순, 작년보다 약 일주일 늦은 시기였다. 탐조가들은 그들의 도착을 반가워하며, 철원 평야가 다시 생명으로 가득 차는 계절이 돌아왔음을 실감했다.
재두루미의 특징과 생김새
재두루미는 천연기념물 제203호이자 멸종위기 야생생물 Ⅱ급으로 지정된 국제 보호 철새다. 몸길이는 115~125㎝에 이르며, 날개를 펼치면 2m 가까이 된다. 회색빛 깃털은 전체적으로 단정한 인상을 주고, 눈 주위의 붉은 피부와 흰 뺨이 뚜렷하게 대비된다. 부리는 길고 곧으며 다리는 어두운 회색을 띤다. 어린 개체는 눈 주위가 붉은색이 아닌 황갈색이고, 날개덮깃에도 갈색이 많아 쉽게 구별된다.
날아오를 때는 목과 다리를 길게 뻗어 균형을 잡으며, 검은 날개 끝이 하늘을 가른다. 세계적으로 존재하는 15종의 두루미 중 하나로, 전 세계 개체 수는 약 5000~6000마리로 알려져 있다. 그중 1500~2000마리가 한국에서 겨울을 난다. 과거에는 훨씬 많은 개체가 이동했지만, 서식지 파괴와 먹이 부족으로 점차 줄고 있다.
습성과 서식 환경
재두루미는 시베리아와 몽골 북부의 습지에서 번식한다. 여름 동안 알을 낳고 새끼를 키운 뒤 10월이면 따뜻한 남쪽으로 이동한다. 한국, 일본, 중국 남부가 주요 월동지다. 한국에서는 철원, 파주, 연천 등 한탄강과 임진강 유역에 주로 머문다. 이 지역은 민통선 안쪽에 있어 사람의 출입이 제한되고, 낙곡과 습지가 풍부해 월동지로 이상적이다.
밤에는 얕은 물가에서 잠을 자고, 낮에는 논과 초지에서 먹이를 찾는다. 먹이는 낙곡, 식물의 뿌리, 갯지렁이, 양서류, 곤충 등으로 잡식성이다. 겨울에는 가족 단위로 무리를 이루며 행동하고, 무리 간에는 일정한 간격을 유지한다.
3월이 되면 이들은 다시 북쪽 번식지로 향한다. 떠나기 전까지 새끼는 비행 연습을 반복하며 긴 여정에 대비한다. 번식지는 습지의 작은 섬으로, 주변에 물이 많아 포식자의 접근이 어렵다. 4월경 암컷은 2~3개의 알을 낳고, 수컷과 함께 교대로 품는다.
재두루미는 일생 동안 짝을 바꾸지 않으며, 부부는 매년 같은 장소를 찾아와 함께 번식한다. 이런 충실한 생활습성 때문에 사람들 사이에서는 ‘평생의 동반자’를 상징하는 새로 알려져 있다.
멸종위기종이 된 이유와 보존의 중요성
재두루미가 멸종위기종으로 지정된 이유 북방의 번식지와 남방의 월동지가 빠르게 사라지고 있기 때문이다. 시베리아의 습지는 산업화와 농업 확장으로 건조화되고 있으며, 한국의 논과 저수지도 개발로 줄어들고 있다. 이동 중 머무는 기착지는 새들의 체력을 회복하는 중요한 공간이지만, 이곳마저 인간의 간섭으로 점점 줄어드는 실정이다. 먹이 부족도 심각한 문제다. 농약 사용으로 낙곡이나 수서곤충이 줄고, 새들이 머물 공간은 좁아졌다. 이 때문에 재두루미의 번식률이 낮아지고 개체 수가 감소했다.
한국 정부는 1968년 5월 31일 재두루미를 천연기념물로 지정했고, 2012년 멸종위기 야생생물 Ⅱ급으로 추가 지정했다. 현재 철원 평야를 비롯한 주요 서식지는 보호구역으로 관리되며, 탐조객의 접근도 제한된다.
재두루미 보호의 핵심은 무분별한 관광 개발보다는 생태 보전 중심의 관리가 필요하며, 농민에게는 친환경 농법과 낙곡 남기기 같은 협력 방안이 제시되고 있다. 탐조객 역시 지정 구역 내에서 조용히 관찰하고, 플래시 촬영이나 접근 시도를 삼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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