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EONEWS=전영선 기자] 2025년 가을, 글로벌 산업계의 지각이 흔들리고 있다. 인공지능(AI)이라는 거대한 파도가 모든 산업을 집어삼키는 가운데, 그 파도를 일으키는 심장, 'AI 반도체'의 패권을 둘러싼 총성 없는 전쟁이 정점으로 치닫고 있다. 지난 수년간 AI 칩 시장의 90% 이상을 장악하며 '왕국'을 건설한 엔비디아. 하지만 그 견고해 보였던 성벽에 거인들이 동시에 균열을 내기 시작했다. 구글, 아마존, 메타 등 엔비디아의 가장 큰 고객이었던 빅테크 기업들이 스스로 칼을 뽑아 들었고, 오랜 경쟁자 AMD는 날카로운 창을 벼려 왕의 심장을 겨누고 있다. AI 시대의 ‘오일’이라 불리는 반도체, 그 지배자를 둘러싼 거대한 전쟁의 서막을 심층 취재했다.
■절대 권력, 엔비디아 제국의 빛과 그림자
현재 AI 시장은 ‘엔비디아 없이는 돌아가지 않는다’는 말이 과언이 아닐 정도로 이 기업에 대한 의존도가 절대적이다. 시장조사업체 가트너의 2025년 보고서에 따르면, AI 모델 학습에 사용되는 데이터센터용 그래픽처리장치(GPU) 시장에서 엔비디아의 점유율은 여전히 90%를 상회한다. 이는 단순한 하드웨어의 성능 우위를 넘어, 20년 가까이 공들여 구축한 소프트웨어 생태계 ‘쿠다(CUDA)’라는 강력한 해자 덕분이다.
전 세계 AI 개발자들은 물과 공기처럼 CUDA를 사용한다. 이 플랫폼 위에서 개발된 수많은 AI 모델과 애플리케이션은 다른 하드웨어로 쉽게 이전하기 어렵다. 이러한 강력한 ‘락인(Lock-in) 효과’는 엔비디아가 ‘부르는 게 값’인 공급자 우위의 시장을 형성하는 근간이 됐다. AI 서비스를 개발하려는 기업들은 울며 겨자 먹기로 엔비디아의 고가 GPU를 확보하기 위해 줄을 서야 했고, 이는 AI 기술 발전의 비용 부담을 가중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하지만 영원한 권력은 없는 법. 엔비디아의 독주는 역설적으로 가장 강력한 적들을 키우는 자양분이 됐다. AI 모델의 규모가 기하급수적으로 커지면서 칩 구매 비용과 막대한 전력 소모에 따른 운영 비용은 빅테크 기업들에게도 감당하기 힘든 수준에 이르렀다.
한 AI 전문가는 “매출의 상당 부분을 특정 기업의 칩을 사는 데 써야 하는 상황은 어떤 CEO도 원치 않을 것”이라며 “엔비디아에 대한 종속에서 벗어나려는 시도는 생존을 위한 필연적인 선택”이라고 분석했다. 결국, 엔비디아의 가장 큰 고객들이 가장 위협적인 경쟁자로 돌아서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연출된 것이다.
■거인들의 반란, '탈(脫)엔비디아' 동맹의 서막
빅테크 기업들의 반란은 ‘자체 칩 개발’이라는 형태로 구체화되고 있다. 이들의 목표는 명확하다. 범용 GPU가 아닌, 자사의 특정 AI 서비스(검색, 광고, 추천 알고리즘 등)에 최적화된 맞춤형 칩(ASIC)을 통해 비용 효율과 성능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겠다는 것이다.
구글은 일찌감치 자체 칩 ‘TPU(Tensor Processing Unit)’를 개발, 자사 데이터센터에 적용하며 AI 칩 독립의 가능성을 증명했다. 아마존 웹 서비스(AWS)는 학습용 칩 ‘트레이니엄’과 추론용 칩 ‘인퍼런시아’를 통해 클라우드 고객들에게 ‘엔비디아 외의 선택지’를 제공하며 영향력을 확대하고 있다. 메타 역시 자체 AI 추론 칩 ‘MTIA’의 차세대 버전을 공개하며 소셜 미디어와 메타버스에 최적화된 AI 인프라 구축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특히, 챗GPT 개발사 오픈AI가 브로드컴과 손잡고 자체 AI 칩 개발에 나선다는 소식은 시장에 큰 충격을 던졌다. AI 소프트웨어의 정점에 있는 기업마저 하드웨어 독립을 선언한 것은 ‘탈엔비디아’ 흐름이 거스를 수 없는 대세가 되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이다. 이들은 개별적인 움직임을 넘어, 최근에는 개방형 소프트웨어 개발과 표준화를 위한 연합체 구성까지 논의하며 엔비디아의 CUDA 생태계에 공동으로 대항하려는 움직임까지 보이고 있다.
■와신상담, AMD의 역습과 새로운 도전자들
빅테크가 내부로부터의 위협이라면, 외부의 가장 강력한 위협은 단연 AMD다. 오랫동안 PC용 CPU, GPU 시장에서 엔비디아, 인텔과 경쟁해 온 AMD는 절치부심 끝에 AI 시장에서 유의미한 대항마로 떠올랐다.
AMD의 최신 AI 가속기 ‘인스팅트(Instinct) MI’ 시리즈는 일부 성능에서 엔비디아의 제품을 능가한다는 평가를 받으며 시장의 주목을 받고 있다. 최근 마이크로소프트, 오라클 등 주요 클라우드 기업들이 AMD 칩을 대규모로 채택하기 시작한 것은 AMD가 엔비디아의 유일한 대안으로 자리매김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AMD의 진짜 무기는 하드웨어가 아닌 소프트웨어에 있다. 엔비디아의 폐쇄적인 CUDA에 맞서, AMD는 개방형 소프트웨어 플랫폼 ‘ROCm’ 생태계 확장에 사활을 걸고 있다. 특정 기업에 종속되지 않는 ‘오픈소스’라는 가치를 내세워 개발자들을 끌어들이고 있으며, 이는 장기적으로 CUDA 제국을 무너뜨릴 가장 강력한 무기가 될 수 있다는 분석이다. 이 외에도 인텔의 ‘가우디’, 그리고 한국의 리벨리온-사피온 합병법인과 같은 스타트업들이 특정 영역(추론, 엣지 컴퓨팅 등)에서 더 높은 전력 효율과 성능을 제공하는 칩을 개발하며 틈새시장을 파고드는 등, 전 세계적으로 수많은 도전자가 AI 칩 전쟁에 뛰어들고 있다.
■미래 전망, 독점의 시대는 가고 춘추전국시대가 온다
결론적으로 AI 칩 시장은 엔비디아의 독주 체제가 막을 내리고, 다양한 플레이어들이 각자의 강점을 내세워 경쟁하는 ‘춘추전국시대’로의 전환이 불가피해 보인다. 물론 단기적으로 엔비디아의 아성은 쉽게 무너지지 않을 것이다. 차세대 ‘블랙웰 울트라’ 칩의 강력한 성능과 CUDA 생태계의 견고함은 여전하다.
하지만 장기적으로 시장은 분화될 것이다. 거대 언어 모델(LLM) 학습과 같은 고성능 범용 시장은 엔비디아와 AMD가 치열하게 경쟁하고, 각 기업의 서비스에 최적화된 맞춤형 칩 시장은 빅테크가 주도하며, 특정 목적을 위한 저전력·고효율 칩 시장에서는 혁신적인 스타트업들이 두각을 나타내는 다원화된 구도가 형성될 가능성이 높다.
이러한 경쟁 구도는 AI 산업 전체에는 긍정적인 신호다. 공급망 다변화는 칩 가격 안정화와 수급난 해소에 기여할 것이며, 치열한 기술 경쟁은 더욱 빠르고 효율적인 AI 기술의 등장을 촉진할 것이다. AI의 심장을 차지하기 위한 거인들의 전쟁. 그 승패에 따라 미래 산업의 지형도가 다시 그려질 것이다. 전쟁의 먼지는 이제 막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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