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2년 세계 최초로 지정된 국립공원인 옐로스톤에 이어 1885년 세번째 국립공원으로 지정된 캐나다 벤프 국립공원에서 이 글을 씁니다.
추적추적 비가 내리는 날, 벤프 거리를 거닐다 작은 갤러리에 들어갔습니다. 캐나다 록키산에서 활동하는 사진작가인 제프 워커의 사진 작품을 전시하는 곳입니다. 들어서자마자 왼쪽 벽에 150호는 됨직한 큰 사진이 눈길을 끌었습니다 (사진1). 햇볕이 쏟아지기 시작할 때 캐나디안 록키의 한 순간을 포착한 뛰어난 작품입니다. 새하얀 나무기둥들이 빽빽하게 들어찬 자작나무 숲 속의 노랗게 물든 단풍과 록키산이 어우러진 장면입니다. (뒤에서 보겠지만 이 설명은 틀렸습니다.)
잠시 머물러 있으니 정성스럽게 수염을 기른 매니저가 다가와 이 작품이 맘에 드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렇다고 하니 많은 사람들 역시 이 작품을 좋아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가 노트북의 키보드를 몇번 두드리자 사진을 비추고 있는 조명 6개가 조도가 낮아지더니 점점 밝아집니다. 그는 이 작품의 특별한 점이 무엇인가를 설명합니다. 빛과 나무와 작가의 마음이 하나로 어우러진 그 찰나를 설명하고 있더군요.
찰나, 75분의 1초인 0.013초라는 그 짧은 순간을 기다리고 기다려 만든 작품입니다. 싹을 트고 꽃망울을 터뜨리는 것도 한 찰나이듯이. 그는 작품을 알아봐 준 나에게 엷은 미소를 띄었고,그것이 또한 내 마음을 기쁘게 해 줍니다.
나는 양해를 구하고 사진을 찍었습니다. 저녁 무렵, 멋진 작품을 보았노라고 일행에게 보여주면서 짧은 설명을 하자 록키산 전문가인 제시카 홍이 자작나무가 아닌 사시나무라 교정합니다. 흰색의 기둥 같은 줄기와 그 뒤의 환상적인 황금빛 단풍도 사시나무라 합니다.
자작나무와 사시나무는 겉보기에 비슷해서 착각하기 쉽습니다. 이 둘의 차이점은, 자작나무는 가로줄 무늬로 껍질이 종이처럼 잘 벗겨지고 사시나무는 마름모 무늬로 잘 떨어지지 않습니다. 또한 사시나무는 잔가지가 많고, 잎새 또한 달걀모양이라 약한 바람에도 잎사귀가 부채처럼 팔랑거립니다. 이 모습이 마치 무서워서 몸을 떠는 것 같아 '사시나무 떨듯이' 라는 속담이 생겨났지요.
캐나디언 로키는 아북극 기후대에 속합니다. 숲은 낮은 고도에 있는 소나무와 높은 곳에 있는 엥겔만 가문비나무가 우세종으로 그 위로는 주로 돌과 얼음입니다. 그런데 사시나무는 생존력이 강해 화재가 난 지역이나 황폐화 땅에서도 잘 자라 김이박처럼 3대 우세종에 넣어도 될 정도입니다. 일종의 생태복원종으로 토양을 비옥하게 할 뿐만 아니라 멋진 단풍까지 제공해 록키를 다채롭게 만듭니다.
캐나디언 록키의 수목성장 한계선은 2,200m입니다. 마치 선을 그은 듯이 수목성장 한계선이 뚜렷하게 보입니다(사진2). 사진에 보이는 바위산 밑의 푸른 선은 모두 가문비나무입니다. 흙도 없고 서 있기 조차 힘든 곳에서 쭉쭉 뻗어 20미터에서 40미터까지 자라는 가문비나무의 장엄함을 경험한 것은 설퍼산(sulphur)의 전망대에 오르면서입니다.
해발 1,123m의 중턱에서 2,281m 높이의 설퍼산 전망대까지 오르는데는 단 8분이 필요했습니다. 곤돌라를 탄지 채 3분도 안되었는데, 산은 온통 가문비나무로 꽉 찼습니다(사진3). 전망대에 오르니 사방이 탁 트이고 수많은 산들의 파노라마가 펼쳐지면서 시선을 압도합니다. 전망대에서 이어지는 설퍼산 데크길을 따라 더 위쪽으로 샘슨 피크까지 올라갑니다. 조그만 틈새 사이로 가문비나무가 쭉쭉 자라고 있습니다(사진4). 1Km의 나무길을 걸으며 로키의 장관들인 설산 고봉들이 360도 파노라마로 펼쳐지며 반깁니다. 캐나디언 록키의 장엄하고 아름다운 풍경 앞에 가슴이 먹먹해집니다. 오늘따라 록키는 자신의 보물을 아낌없이 드러냅니다.
나는 록키의 수많은 보물 중 소중한 가문비나무를 실컷 만났습니다. 왜 꽃말이 정직과 성실인지 이 높은 높이에서 자라는 그를 보면 즉시 알게 됩니다. 가문비나무는 가볍고 강도가 균형잡힌 덕에 다양한 분야에서 활용되는 목재입니다. 오래 전부터 건축재, 가구재로 활용되었고, 특히 소리를 잘 울려주는 성질 덕분에 바이올린, 기타, 피아노 등의 상판재료로 오래 동안 사랑을 받았습니다.
"고지대의 척박한 환경은 가문비나무가 생존하는데 고난이지만 울림에는 축복입니다. 메마른 땅을 통해 나무들이 아주 단단해지기 때문입니다. 이런 목재가 울림의 소명을 받습니다." (마틴 쓜레스케, 가문비나무의 노래)
단순한 목재를 넘어 인간의 삶과 예술 속에서 오래 동안 함께 해 온 특별한 나무인 가문비나무를 통해 인생을 보게 됩니다. 나 또한 어떤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가문비나무처럼 꼿꼿하게 자신의 일을 해내리라 다짐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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