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데이신문 홍기원 기자】 캄보디아에서 한국 대학생이 고문 살해된 사건이 알려진 뒤 그동안 외면받았던 재외국민 안전 문제가 발등에 떨어진 불이 됐다. 대한민국의 영사 조력(사건사고로부터 재외국민의 생명과 신체 및 재산을 보호하기 위해 국가가 재외국민에게 제공하는 조력)이 시험대에 올라선 모습이다.
경북 예천 출신의 대학생이 캄보디아로 출국했다가 범죄조직에 의해 숨진 것으로 알려진 가운데 전국에서 이와 비슷한 신고가 전국에서 잇따르고 있다. 몇몇은 무사히 구출됐지만 일부는 연락이 끊겨 행방을 알 수 없는 상황이다.
13일 경찰 등에 따르면 지난 9일 “아들인 A씨가 남성 지인 2명과 함께 캄보디아로 여행을 갔다가 프놈펜의 한 건물 안에서 감시받고 있다고 연락했다”는 부모의 신고가 접수됐다. 경찰에 따르면 A씨는 지난 8월 6일 캄보디아로 출국했으며 동행한 지인 2명의 정확한 신원이나 행방은 확인되지 않았다.
경찰은 캄보디아 경찰 당국에 신병 확인을 위한 공조를 요청하겠다는 계획이다. 경찰은 A씨가 “현지에서 한국인 인솔자를 따라갔다가 어느 건물에서 감시 당하게 됐다”라며 현지 범죄에 가담했을 가능성도 배제하지 않고 있다.
같은 날 경찰에 따르면 경북 상주의 30대 남성 B씨도 캄보디아로 출국했다가 납치됐다는 가족의 신고가 접수됐다. B씨는 지난 8월 19일 출국했으며 5일 뒤인 24일 텔레그램 영상 통화로 가족에게 “2000만원을 보내주면 풀려날 수 있다”고 연락했다. 이후 현재까지 연락이 안 되고 있다.
광주 광산구에 사는 C씨는 지난 6월 26일 태국으로 떠난 뒤 연락이 끊겼다. C씨는 8월 10일에 가족들과 마지막으로 통화했는데 당시 캄보디아 프놈펜에 있었던 것으로 확인됐다.
C씨의 가족들은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와서 받았더니 ‘살려달라’는 음성을 들었다고 진술해 범죄 연루 가능성이 의심되고 있다. 경찰은 통신 기록 등을 보면 C씨가 캄보디아에 있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최근에는 캄보디아에서 고문과 감금을 당했던 한국인 2명이 박찬대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 의원의 도움으로 구조되기도 했다. 이들은 IT 관련 업무를 하면 고수익을 보장하겠다는 얘기에 캄보디아로 갔으나 범죄조직에 납치돼 구타를 당했다.
박 의원 측은 지난달 초 감금된 한국인 중 한 명의 가족으로부터 요청을 받은 뒤 외교부, 영사관 등과 소통해 이들을 구할 수 있었다. 박 의원 측은 가족, 외교부, 캄보디아 영사관 등과 협조해 지난 2일 현지 경찰과 함께 이들을 구할 수 있었다.
박 의원이 외교부로부터 제출받은 최근 5년간 동남아지역 취업사기 감금 피해 신고 접수 통계를 보면 캄보디아 내 납치 및 감금 피해는 2021년 4건에서 지난해 220건으로 나타났으며 올해는 8월말 기준 330건이나 된다. 박 의원은 이번 한국인 구출 과정에서 사전 모니터링 부재, 인력 미 예산 부족, 공관 업무 마비 등의 구조적 한계를 확인했다며 지난달 30일 재외국민보호를 위한 영사조력법 개정안을 대표발의했다.
“범죄 늘어나는데도 몇 년째 당하기만”
한편, 외교부는 지난 11일 “주캄보디아대사관은 현지 경찰로부터 국민의 사망 사실을 통보받은 직후부터 캄보디아 측에 신속한 수사를 요청하는 한편, 국내 유가족과 수시로 직접 소통해 현지 수사 진행 상황과 부검 관련 절차를 안내하는 등 영사 조력을 제공해 왔다”라고 해명했다. 그러나 유재성 경찰청장 직무대행은 13일 기자간담회에서 “캄보디아는 경찰 간 공조가 상대적으로 원활하지 않다”라며 현지 수사와 피해자 송환에 어려움이 있다고 전했다.
캄보디아 경찰은 취업사기 및 감금 피해 신고시 ▲신고자의 현재 위치 ▲연락처 ▲건물 사진(명칭, 동호수) ▲여권사본 ▲얼굴 사진 ▲본인 구조 요청 영상 등을 전송해야 한다고 요구하고 있다. 외교부는 “감금 상태에서 신고자가 캄보디아 당국이 요구하는 정보를 모두 제공하기 어렵기에 신원과 위치정보만으로도 경찰이 출동할 수 있도록 절차 간소화 방안을 검토해 줄 것을 요청하고 있다”고 했지만 효과는 미지수다.
외교당국과 현지 관계자들에 의하면 고수익 취업사기, 납치 및 감금 등의 범죄는 비단 캄보디아뿐 아니라 미얀마, 태국, 라오스, 필리핀 등 동남아지역 국가들에서도 피해 사례가 늘어나고 있다. 고수익 취업사기의 수법은 SNS 등으로 고수익 일자리를 제안해 피해자들을 해외로 유인한다. 이후 피해자들의 여권과 휴대전화를 뺏고 보이스피싱 등의 범죄에 활용한다.
이에 정부는 지난 2023년 11월 고수익 취업사기의 온상으로 점찍힌 미얀마 일부지역과 라오스 내 골든 트라이앵글 경제특구에 대한 여행경보 4단계(여행금지)를 발령한 바 있다. 이어 정부는 지난 10일 캄보디아 프놈펜에 대한 여행경보를 2단계(여행자제)에서 2.5단계(특별여행주의보)로 상향 조정했다.
그러나 이같은 조치만으로는 우리 국민을 대상으로 늘어나는 범죄에 대응하기 어렵다는 지적이 높다. 주캄보디아 한국 대사는 3개월째 공석 상태이며 현재 캄보디아 대사관에서는 3명의 경찰관만 근무하고 있다. 정부는 우선 캄보디아와 현지 경찰기관에 한인 대상 범죄를 전담하는 ‘코리안 데스크’ 설치를 논의하겠다는 입장이다.
윤해성 한국형사법무정책연구원 AI·미래정책연구실장은 본보와의 통화에서 “정부가 지금까지 관심을 갖지 않은 것이 가장 큰 문제”라며 “캄보디아 등이 위험한 지역임을 알면서도 현지에서 관련 업무를 담당하는 인력이 너무 적다”고 진단했다. 그러면서 “국내에서도 고수익을 내세운 허위 광고 등이 SNS 등을 통해 퍼지지 않도록 막는 장치를 늘려야 한다. 또, 불법사이트는 차단과 함께 인터폴과 공조를 해서 추적해야 하고 인터넷도박도 면밀하게 모니터링할 필요가 있다”고 덧붙였다.
윤 실장은 “범죄가 계속 늘어나며 몇 년이 흘렀는데도 계속 당하고만 있지 않았나”라며 “현재 범죄조직 입장에서 한국은 봉”이라고 꼬집기도 했다. 그는 “동남아지역 한인 범죄에 대처할 수 있는 공조체계를 구축하고 사이버범죄에 대응할 수 있도록 유럽평의회가 채택한 사이버범죄 국제협약(부다페스트 협약) 가입도 서둘러 추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국민 안전 지키는 영사 조력 기대할 수 있나
지난달 4일 발생한 미국 조지아주 구금사태 역시 정부의 영사 조력 역량을 돌아보게 하는 장면이다. 당시에도 주미한국대사와 조지아주를 관할하는 애틀랜타 총영사 자리가 공석이었다.
당시 미국 이민 당국은 조지아주 브라이언카운티에 위치한 베터리회사 건설 현장을 급습해 한국인 근로자 317명을 체포 및 구금했다. 이 과정에서 인권침해 등의 문제가 불거졌으며 외교부는 지난달 8일 구금된 우리 국민에 대한 적극적인 영사 조력 지원을 위한 신속대응팀을 현지에 파견했다.
홍기원 민주당 의원은 지난 9일 외교부로부터 받은 2020년부터 지난해까지 미국 내 불법체류자 강제추방 현황 자료를 보면 미국에서 강제추방된 한국인은 70명이지만 같은기간 미국 이민세관단속국의 연례보고서를 보면 강제추방된 한국인이 367명이나 된다. 이에 홍 의원은 “미국이 발표하는 공식적 통계와 동떨어진 우리 영사 조력 실적은 현재 우리 시스템에 큰 구멍이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라고 말했다.
지난해 1월에는 이탈리아 여행을 간 한국인 관광객이 괴한들에게 폭행을 당한 뒤 도난 피해를 입어 현재 밀라노 주재 영사관에 도움을 요청했으나 통역 도움을 받지 못했다는 보도가 나오기도 했다. 이에 외교부는 주밀라노 총영사관이 사건을 접수했으며 접수 직후 민원인에게 경찰 신고와 병원 응급실 등을 안내했다고 해명했다.
강선우 민주당 의원은 지난 8일 외교부로부터 받은 자료에 따르면 4년 새 해외에서 사망한 국민이 50% 가량 늘었지만 관련 예산은 그대로라고 지적했다. 외교부에 따르면 지난해 해외에서 사망한 국민은 1410명으로 2021년 903명과 비교해 56.1% 증가했다. 그러나 동기간 외교부가 재외국민 보호를 위해 편성한 예산은 2021년 139억원에서 올해 140억원으로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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