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퍼사이클'(Super Cycle). 주요 산업군에서 특정 업종의 경기가 꾸준히 상승하는 시기를 말한다.
해당 업종이 장기간 침체기에 있다가 다시 호황기에 진입하거나 기업 매출이나 실적이 호조돼 주가가 상승기에 접어들었을 때도 슈퍼사이클이라 지칭한다.
최근에는 반도체 업계에 슈퍼사이클이란 말이 자주 등장한다. 반도체 경기의 상승 추세를 지칭하는 말로 슈퍼사이클에 대한 기대감이 글로벌 빅테크 업계에서 높아지고 있다.
슈퍼사이클 시기로 반도체 업황을 지칭할 때는 여러 가지 기준이 있다. 사이클의 상승 추세, 가격 변동, 시장 규모, 주요 업체들의 이익 증감률 등 다양한 기준에 따라 관련 업계에서는 특정 시기를 '슈퍼사이클'로 지칭한다.
대체적으로 4~5년을 주기로 2년 여간 이어지는 것을 슈퍼사이클로 보는 게 반도체 업계의 일반적인 관측이다. 증권가 일각에서는 반도체 평균 판매가가 2년 연속 상승하면 슈퍼사이클로 정의하는 경우도 있다.
반도체 슈퍼사이클은 IT 기술의 발전과 함께 발생해왔다는 것도 특징이다. 1990년대 전 세계 PC 수요가 크게 증가했던 시기가 대표적이다. 개인용 PC의 보급이 증가하고 인터넷 활용이 일반화되던 1990년대 중후반은 반도체 수요도 동반 성장한 대표적인 슈퍼사이클 시기로 꼽힌다.
아이폰으로 대변되는 스마트폰이 대중화됐던 2010년대 초반도 슈퍼사이클 시기다. 스마트폰 대중화 역시 관련 반도체 수요 증가세를 이끌었기 때문이다.
최근 슈퍼사이클 시기로 업계이서 꼽는 것은 2017~2018년 이후다. 이 시기는 바로 빅데이터, 클라우드 컴퓨팅 등 4차산업 초입 단계다. 이 시기를 지나면서 AI, 자율주행차, 사물인터넷 등 새로운 IT 이슈가 반도체 업황 성장에 촉매제가 됐다.
업계 관계자에 따르면 이 시기 우리나라 대표 반도체 업체들의 영업이익률은 삼성전자는 74%, SK하이닉스는 50%대까지 올랐던 것으로 알려졌다.
2020년대 초 코로나 펜데믹으로 전 세계 경기가 침체 위협을 받았을 때도 반도체 업계의 슈퍼사이클은 이어졌다. 비대면 경제가 활성화 되면서 디지털 기기의 수요가 증가했고 온라인 동영상 서비스(OTT)도 등장했기 때문인 것으로 풀이된다.
하지만 슈퍼사이클의 상승세는 이 시기 이후 하락 추세로 반전해 최근 몇 년간 전 세계 반도체 업계는 침체의 터널을 지나왔다. 미중 패권 경쟁,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글로벌 경기의 동반 침체 등의 여파가 반도체 업황에 직격탄이 됐기 때문이다.
실제 2021년 하반기부터 전 세계 D램 공급 가격이 하락세로 돌아서고 이듬해인 2022년에는 실적 감소와 적자를 보이는 반도체 업체가 생겨나면서 급격한 침체 국면에 들어갔다는 게 관련 업계의 판단이다.
이와 관련 미국 반도체산업협회(SIA)의 자료에 따르면 2022년 9월은 이전 2020년 1월 이후 2년 8개월여만에 세계 반도체 판매 금액이 감소한 시기로 꼽힌다. 이 시기를 기점으로 2022년 전 세계 반도체 시장 매출은 한 자릿수 성장, 지난해에는 역성장했다는 게 업계 일반의 관측이다.
관련 업계에서는 과거와 같은 슈퍼사이클 주기에 변화가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실제 국제정세, 경기변동 등 여러 대외적인 요인이 경기 전망에 불확실성을 더하고 있으며, 우리나라 반도체 업체들도 '성장' 우선이 아닌 '생존'을 앞세운 전략 펼쳐 왔다. 한마디로 예측 불가한 불확실성 시대에 생존력 확보가 글로벌 반도체 업계에도 우선 과제가 된 셈이다.
업계 한 관계자는 “과거 슈퍼사이클의 잣대로 반도체 시장을 전망하는 것은 의미가 없을 수 있다”며 “첨단 디지털 기술의 개발 및 발전 속도가 빨라지면서 제품군이 다양해지고 새로운 수요처도 예측 불가한 곳에서 생겨날 수 있는 만큼 침체 상황에서도 곧바로 성장세에 대비할 수 있는 호환체계 마련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회복기와 침체기의 부침이 반복되고, 그 변화의 폭이 예측하기 어렵게 빨라지고 있는 상황에서 단기간의 호황과 불황은 장기간 추세 상승이란 슈퍼사이클의 범주에 속해 있는 시기라 할 수 있다는 게 업계 관계자들이 일반적인 전언이다.
주목되는 것은 최근 전 세계 반도체 업황에 긍정 신호가 이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최근 몇 년간 ‘최악의 한파’로 표현되는 반도체 업계에 훈풍의 반등 신호가 이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대표적인 이슈가 AI 시장 확대다. AI 서비스와 기술이 본격 일반화되고 있는 상황에서 관련 반도체 수요도 견인될 것 기대되기 때문이다. 특히 AI 관련 시장 확대는 메모리 분야에서 강점이 있는 삼성전자, SK하이닉스 등 국내 업체들에게 더욱 호재가 될 전망이다.
시장 상황에서도 호재가 감지됐다. 최근 D램과 낸드 등 글로벌 메모리 공급가격이 상승세를 지속하고 있으며, 특히 국내 업체들이 개발 우위에 있는 HBM 등 고사양 메모리에 대한 수요도 확산 추세다.
실제 최근 발표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3분기 성적표에서도 반도체 시장에 새로운 슈퍼사이클이 도래했음을 예측하게 하고 있다. 증권가에서는 오는 14일 3분기 잠정실적을 발표할 삼성전자 메모리 사업부가 5~6조원의 영업이익을 기록할 것으로 보고 있다. 특히 3분기 HBM 매출은 전 분기 대비 98% 증가해 전체 메모리 부분의 실적 개선을 이끌었다는 게 증권가 일각의 분석이다.
삼성전자는 '엔비디아'와 경쟁사인 AMD의 AI 가속기에 HBM3E 12단 제품을 공급 중이다. 최근 AMD가 오픈AI와 대규모 GPU 공급 계약을 체결한 것도 삼성전자의 수혜로 이어질 것으로 기대되는 부분이다.
여기에 D램 공급가의 가격 상승도 호재다. 최근 반도체 관련 시장조자업체 D램익스체인지에 따르면 지난달 PC용 D램 범용 제품의 평균 고정거래가격은 전달보다 10.5% 오른 6.3달러로 집계됐다. 2019년 1월 이후 6년 8개월만에 같은 조사에서 관련 D램 제품의 고정거래가격이 6달러를 넘어선 것이다.
범용 D램 고정거래가격 상승은 전세계 D램 시장을 선도하고 있는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등 우리나라 반도체 업체들의 수익성 향상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이같은 추세는 SK하이닉스의 성장세도 더욱 견인할 것으로 전망된다. 엔비디아의 HBM3E 12단 제품을 사실상 독점 공급하고 있는 SK하이닉스는 글로벌 주요 메모리 업체 중 가장 먼저 HBM4 양산 준비를 마치고 엔비디아와 막판 공급 물량 협상을 진행 중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같은 성과에 힘입어 SK하이닉스의 올해 3분기 실적은 창사 이래 처음으로 분기 10조원 영업이익 돌파를 기록할 것이란 관측도 나오고 있다.
카운터포인트리서치의 최근 자료에 따르면 올해 2분기 글로벌 HBM 시장에서 SK하이닉스의 점유율은 62%로 1위, 마이크론과 삼성전자는 각각 21%와 17%의 점율로 2위와 3위다. 글로벌 HBM 시장만 놓고 보면 SK하이닉스와 삼성전자 등 우리나라 기업의 점유율은 약 80%에 이른다.
반도체 업황의 슈퍼사이클이 예고되면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대응 채비도 분주하게 전개되고 있다. 우선 인재 확보에 총력을 기울이는 모습이다.
하반기 신입사원 채용 절차를 진행 중인 삼성전자는 채용 합격된 신입사원들을 내년 상반기 공정 개발, 회로 설계 등 반도체 주요 공정에 투입할 계획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차세대 메모리 기술 개발과 미래 성장 동력 확보에 적확한 인재 확보가 관건이라는 판단에 따른 채용 절차인 것으로 풀이되고 있다.
SK하이닉스 역시 채용 홈페이지를 통해 HBM 회로 설계 등 핵심 공정 분야에 경력직 인재 확보에 나선 상태다. 여기에 신입 채용 절차도 병행하고 있는 SK하이닉스는 주요 반도체 분야 핵심 인재를 세 자릿수 규모로 채용할 것으로 알려졌다.
이처럼 슈퍼사이클의 도래로 모처럼 업황 부흥의 기대감이 커지고 있는 반도체 업계에서 우리나라 업체들이 글로벌 시장에서 차세대 성장 주도권을 거머지게 될 지에 귀추가 주목되는 상황이다.
배충현 기자 / 경제를 읽는 맑은 창 - 비즈니스플러스
Copyright ⓒ 비즈니스플러스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본 콘텐츠는 뉴스픽 파트너스에서 공유된 콘텐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