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10.11.토요일]
당금 조정의 풍파는 후한(後漢) 말, 위무제 조조(魏武帝 曹操)가 헌제(獻帝)를 끼고 천하를 호령하던 시대상과 크게 다르지 아니하다. 내명부(內命婦) 깊숙한 곳에서 권력을 휘두른다는 의혹을 받은 부속실장 현지(賢智, 김현지)를 둘러싼 국문(國問, 국정감사) 출석 공방은, 간웅(奸雄) 조조의 통치술과 그를 에워싼 청류파(淸流派, 야당) 및 탁류파(濁流派, 여당)의 대립 구도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청류파는 오직 공적 도덕성과 투명성을 외쳤으며, 조조의 막부(幕府)는 이를 난세에 적합하지 않은 "정쟁(政爭)을 위한 공격"으로 규정하며 맞섰다. 이 대립은 단순한 정파 간의 충돌을 넘어, 난세를 다스리는 권력이 과연 공정성과 정당성 위에 서야 하는지, 아니면 오직 효율성과 충성심만을 중시해야 하는지에 대한 근본적인 철학적 투쟁이었다.
난세의 주군(主君), 오직 재능을 구하다
위무제 조조는 스스로를 난세의 영웅이라 칭하며, 천하를 평정하기 위해서는 오직 재능(才能)만이 중요하다고 믿었다. 이는 그의 인재 등용 철학의 근간을 이루었는데, 조조는 재능을 가진 인재라면 그가 가진 윤리적 단점이나 과거의 악연은 개의치 않았다. 심지어 조조는 "한 개인에게 단점이 있다 하여 등용하지 않을 수 없다"며, 직무와 직접적으로 관련 없는 단점을 문제 삼아 인재를 내팽개치는 행태를 비판했다. 조조가 "천하를 다투는 것은 인재를 다투는 것"이라 선언한 것은, 그의 통치가 능력주의를 최우선 가치로 삼았음을 명확히 보여준다.
현대 정치에 투영된 조조의 이러한 방식은, 당대의 비난을 감수하면서까지 논란이 되는 인물을 측근에 두는 행위로 나타났다. 조조는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고 효율적인 통치를 실현하기 위해서라면, 비판과 의혹을 감수하는 간웅적 면모를 보였다. 예를 들어, 조조가 자신을 해치려 했던 여백사를 오히려 잔인하게 처단하고도 (물론 이 기록에 대해서는 상반된 주장이 존재하지만 ), 스스로의 행위를 합리화했듯이, 조조의 행태는 효율성을 얻기 위해 정당성을 희생시키는 간웅의 전형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효율 중심의 통치는 치명적인 문제점을 내포하고 있었다. 단기적인 효율성은 증대될지언정, 논란이 많은 측근을 중용하는 행위는 결국 '비선 논란'이나 '측근 전횡'을 초래하며 정권의 정당성에 깊은 상처를 입힌다. 청류파 사대부들이 현지(賢智)를 '미스테리한 공직자'라 칭하며 국민적 의혹 해소를 요구한 것은 , 조조 정권이 표방하는 능력주의 뒤에 숨겨진 정당성 문제를 정면으로 공격한 것이다.
조정에 감도는 국문(國問)의 서막
위무제가 천하를 통치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민의를 등에 업고 조정을 심문하는 공적 절차인 국문(國問)이 다가왔다. 이 국문을 통해 청류파 사대부들은 조정의 불투명함과 문란함을 바로잡고자 현지의 출석을 강력히 요구했다. 청류파는 현지를 국문에 세워 의혹을 해소하는 것이 야당의 "정당한 요구"임을 천명했으나, 조조의 막부(幕府)를 이루는 탁류파 관료들은 이를 "정쟁으로 치부하는 것은 궁색한 변명"이라며 반발했다.
탁류파의 백승아 원내대변인은 현지의 국문 출석 요구를 "매우 불순한 정치 공세"로 규정하며 , 현 정권을 발목 잡고 윤석열 정부 시기의 국정 농단 의혹을 덮기 위한 "정치적 술수"라고 일축했다. 이처럼 공적 심판 절차를 두고 권력의 투명성을 요구하는 청류파와, 권력 수호를 위해 이를 정치적 공격으로 프레임화하려는 탁류파 간의 첨예한 대립은, 후한 말기 조정의 도덕적 혼란을 연상케 했다.
내명부(內命婦)의 그림자 실세 현지(賢智)
실세 논란의 중심에 선 현지는 본래 총무 비서(總務秘書, 재정 및 인사를 관장하는 핵심 직책)를 맡았을 때부터 이미 공식 서열을 압도하는 비공식적 권력을 행사하고 있다는 의혹을 받아왔다. 청류파의 최은석 원내수석대변인은 현지가 단순한 '곳간지기'가 아니라, '실세 위의 실세'로서 '실질적 안방마님'으로 군림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안방마님'이라는 칭호는 현지의 권력이 공식적인 행정 라인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위무제 조조 개인과의 사적이고 은밀한 관계에서 파생된 비선(秘線) 권력임을 강력히 시사했다. 현지는 대통령실 내부 인사뿐만 아니라 산하기관장, 심지어 중앙 부처 국장급 인사에까지 개입했다는 의혹이 끊이지 않았으며, 이는 공식 서열을 무시하는 인사 전횡의 암시로 여겨졌다.
이러한 현지의 존재는 후한 말기 환관 세력인 십상시(十常侍)가 황제 영제(靈帝)의 곁에서 모든 행정 사무와 인사 권한을 장악하며 조정의 문란함을 초래했던 역사적 폐해 와 그 맥을 같이한다. 조조 정권이 표방하던 능력 중심의 새로운 질서가 결국 사적인 측근 정치로 퇴행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징표였던 것이다.
실세 논란에 대한 조조 막부의 방어
현지의 그림자 실세 논란이 격화되자, 조조의 최고 참모들인 비서령 강훈식과 정무수석 우상호 등은 필사적으로 방어에 나섰다. 비서령 강훈식은 공식 기관장으로서 "기관장이니 제가 실세여야 맞다"며 자신이 실세임을 반복적으로 주장했고, 정무수석 우상호 역시 "대통령실 실세는 강훈식"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나 청류파는 이러한 필사적인 감싸기가 오히려 진실을 역설적으로 드러낸다고 비판했다. 공식적인 권위를 가진 인물들이 반복해서 자신들의 실세임을 주장해야 하는 상황 자체가 이미 권력의 중심이 현지와 같은 비선 측근에게 이동했음을 방증하는 셈이었다. 이는 조조가 공적 권위는 형식적으로 유지하되, 실질적인 권력은 사적으로 운영하는 이중적인 간웅의 통치 방식임을 드러낸다. 공식 대변자들이 '허위 명분'을 내세울 수밖에 없는 상황은 조조의 통치가 공정성과 투명성을 결여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결정적인 증거였다.
청류파의 공세: 의혹 해소 요구
국문 시작을 불과 이틀 앞두고, 청류파(국민의힘)는 현지의 출석 요구를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이들은 현지가 국회에 직접 나와 모든 의혹을 소명하는 것이 "국민적 의혹 해소"를 위한 야당의 "정당한 요구"라고 천명했다.
박성훈 수석대변인은 현지 측이 "구차한 변명으로 일관하며 빠져나갈 궁리만 하는 것"은 오히려 "국민적 의심만 증폭시킨다"고 맹렬히 비판했다. 만약 현지가 떳떳하다면 당당히 나와 해명함으로써 국민께 진실을 밝혀야 하며, 피할수록 의혹이 눈덩이처럼 불어나 결국 조조 정권에 큰 부담만 주게 될 것이라는 분석이었다. 이는 후한 시대, 청류파 사대부들이 부패한 탁류파 세력을 향해 목숨을 걸고 탄핵을 올리던 모습 과 동일하게, 공적인 심판 절차를 통해 비정상적 권력 행사를 정화하려는 마지막 의지를 보여주었다.
조조 막부의 방패: 정쟁화(政爭化)의 술수
현지 측근들(더불어민주당)은 현지 출석 요구를 막기 위해 전력투구했다. 그들은 현지 출석 요구가 윤석열 정부의 국정 농단 의혹을 덮기 위한 "정치적 술수"이며 , 현 정권의 국정 운영을 방해하려는 "발목 잡겠다는 의도"라고 강변했다.
백승아 원내대변인은 이러한 요구를 "매우 불순한 정치 공세"로 규정했으며 , 김병기 원내대표 역시 국문(국정감사)을 정쟁의 수단으로 삼는 것은 용납하지 않겠다고 직격했다. 이러한 방어 논리는 현지 개인의 의혹 해소보다는 '국정의 안정'과 '정권 보호'를 최우선 가치로 내세우며, 공적 의혹을 사적 정쟁으로 치부하려는 탁류파의 전형적인 술수였다.
그러나 이 정쟁 프레이밍 전략은 한계를 지닐 수밖에 없었다. 현지 측을 방어하는 정당은 과거 두 번의 비선 국정농단을 방치했던 전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 백 원내대변인이 "두 번의 비선 국정농단을 방치한 정당이 대통령실을 입에 올릴 자격이 있느냐"고 역공을 펼친 것은 오히려 자가당착을 유발했다. 조조의 막부가 모든 비판을 정쟁으로 몰아가는 것은 단기적인 방어 효과는 있을지 몰라도, 국민적 의혹을 해소하지 않고 지속될 경우 '모든 공적 의혹을 정쟁으로 치부한다'는 불신을 심화시키며 권력의 투명성을 근본적으로 훼손할 수밖에 없다.
공적 서열과 사적 권력의 전도(顚倒)
청류파는 조조 진영의 모순적인 행태를 비판하며 '체급 논란'이라는 날카로운 공격을 가했다. 청류파는 조조 막부가 최고위직인 대법원장(삼공에 준하는 서열)에 대해서는 청문회장에서 엄중한 심판을 요구하면서도 , 직급이 훨씬 낮은 부속실장(개인 측근)에 대해서는 국문 출석을 막기 위해 '전력투구'하는 이중적 모습을 보였다고 지적했다.
박성훈 수석대변인은 "부속실장이 의전 서열 3위인 대법원장보다 막강한 존재인가?"라고 반문하며 , 청류파의 박지원 의원 역시 조조 측근들이 "대법원장의 체급은 내리고 부속실장의 체급은 상승시키고 있다"며 공적인 서열 기준이 무너졌음을 비판했다. 이 논란은 위무제 조정에서 공식적인 체계(의전 서열)가 아닌, 비공식적인 충성도와 사적 친분이 실질적인 권력 서열을 결정하는 '비정상적 조정'이 구축되었음을 입증하는 강력한 논거였다.
간웅 조조의 이중 전략
이러한 체급 논란은 후한 말기 황실의 몰락 과정과 유사하다. 황실의 권위가 추락했을 때, 조정의 공적인 관직(삼공)은 형식적인 명분만 남았고, 환관이나 측근과 같이 사적인 관계를 통해 권력을 얻은 자들이 실질적인 권한을 장악했다. 조조 조정에서 대법원장(공적 심판 기관)은 쉽게 공격 대상이 되는 반면, 현지(사적 측근)는 철통 방어되는 현상은 바로 이 권력 전도의 징후였다.
조조의 통치 전략을 분석해 볼 때, 그는 공적인 기관(대법원 등)에 대해서는 철저한 견제와 심판을 통해 자신의 권위에 도전할 수 없도록 사전에 방지하는 전략을 취했다. 반면, 자신에게 절대적으로 충성하는 사적 측근(현지)에 대해서는 모든 의혹으로부터 보호함으로써, '자신에게 충성하는 자는 반드시 보상받는다'는 메시지를 조정 내부에 강력하게 각인시키려 한 것이다. 이는 조조의 통치 철학인 재능과 충성심의 극단적 보상 시스템을 상징하며, 그가 공식적인 제도보다 자신의 권력 유지를 우선시하는 간웅이었음을 여실히 보여준다.
보직 변경의 술수와 국문 회피
국문이 임박하자, 위무제는 현지를 둘러싼 논란을 피하고자 기발한 계책을 단행했다. 현지 총무비서관을 제1부속실장으로 전격 이동시킨 것이다. 조조의 막부는 이를 공보 기능 강화를 위한 조직 개편 및 정부 운영 시행착오를 겪은 후의 인사 재배치 라고 공식적으로 설명했다.
그러나 그 내막을 살펴보면, 총무비서관은 1992년부터 국감에 빠짐없이 출석해야 했던 직책인 반면, 부속실장은 대통령 수행 등의 명분으로 국감에 나오지 않는 것이 관례였다. 청류파는 이 점을 놓치지 않고, 이번 인사를 현지를 국감장에 세우지 않기 위한 "기발하고 독특한 발상"이자 , "국감 출석 회피용" 명분 만들기라고 즉각 비판했다. 청류파의 장동혁 대표는 "총무비서관을 국감에 출석시키려고 했더니 갑자기 자리를 바꿔버렸다. 도대체 무엇을 숨겨야 하는 것이고, 뭘 감춰야 하는 거냐"고 맹렬히 비난했다.
주군(主君)의 기만: '준비된 인사'의 허울
이에 조조의 참모들은 이 인사가 국감 회피용이 아니며, 이미 한 달 전부터 조직 개편을 준비하고 있었다고 강하게 반박했다. 비서령 강훈식은 인사수석 임명 때부터 개편을 예고했었다고 해명했지만 , 이 시의적절한 보직 변경은 간웅 조조가 관료제의 형식적 규칙(국감 출석 관례)을 이용하여 정치적 위기를 모면하려 했다는 의혹을 잠재우지 못했다.
조조는 논란을 피할 수 없을 때마다 교묘하게 사실을 변형하거나 합리화하는 데 능숙했는데, 이번 '준비된 인사'라는 공식적 발표 역시 자신의 책략을 공적 논리로 포장하는 데 능숙했음을 보여주는 사례였다. 조조가 단순히 인재를 지키려 한 것을 넘어, 행정적 술수를 통해 위기를 모면했다는 사실 자체가 현지가 '실세 위의 실세'임을 역설적으로 확증시킨 것이다. 회피하려는 행위가 오히려 현지의 중요성을 입증한 셈이다.
간웅(奸雄)의 통치술과 천하의 운명
현지 부속실장 출석 논란은 위무제 조조의 통치 스타일과 권력 구조의 근본적인 취약점을 여실히 드러냈다. 조조는 오직 '재능'과 '충성심'만을 내세워 논란 있는 인재를 등용하고 방어했지만 , 이 행위는 사적인 충성심이 공적인 의전보다 우위에 있다는 사실을 만천하에 공표한 것과 같았다.
가장 중요한 것은 권력의 탈공식화 현상이었다. 공식적인 비서령(강훈식)과 삼공(대법원장)의 권위는 형식적인 명분만 남았고, 현지와 같은 사적인 측근 인맥이 실질적인 권력을 장악했다. 조조가 행정적 술수(보직 변경)를 통해 위기를 회피하려 시도한 행위 는, 그의 통치가 '조직 효율성'보다는 '개인 보호'를 최우선 목표로 삼았음을 역설적으로 증명했다.
조조 시대의 풍자적 전망
청류파의 공격은 조조의 비정통성(非正統性)을 노린 것이었으며, 조조는 이 공격을 '정쟁'이라는 방패로 막으려 했다. 이 대립은 단순한 정책적 충돌이 아닌, 권력의 정당성을 공적인 제도에 두어야 하는지, 아니면 사적인 충성심에 두어야 하는지에 대한 근본적인 투쟁이었다.
위무제 조조는 뛰어난 군사 전략가이자 정치가로서 난세를 평정하는 데 탁월한 능력을 보였으나 , 사적인 권력을 척결하고 공적인 도덕성을 회복하는 데 실패함으로써 결국 후한 말기 환관 세력의 폐해 를 반복할 것이라는 경고를 받았다. 조조가 만약 이 비판을 수용하고 공적인 제도와 투명성을 강화했다면 그의 위(魏)나라 통치는 더욱 견고했을 것이다. 하지만 간웅은 언제나 자신의 이익과 측근 방어를 우선시하기 마련이며, 공정성을 외치는 민의를 외면하고 사적인 관계에 의존하는 통치는, 장기적으로 조조 천하에 대한 국민적 불신을 심화시키는 내재적 독소가 될 수밖에 없었다. 현지 논란은 조조 정권의 권력 운용 방식이 투명성과는 거리가 멀며, 언제든 사적 전횡으로 나아갈 수 있음을 만천하에 드러낸 사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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