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의 산업혁명
이와쿠라 사절단의 시간 감각
1900년 초기 일본은 근대화와 산업혁명에 성공하여 열강에 진입했고 조선은 망국에 이르렀다. 무엇이 한국과 일본의 운명을 극단으로 갈랐을까? 근대를 연 것은 서유럽이다. 뭐라 해도 근대의 특징은 개인의 권리 확대, 사유재산권 보장, 법치주의, 입헌주의다. 오늘날에 와서는 이미 식상한 것들이다. 일본은 어떻게 해서 자신의 문명에서 스스로 벗어나 서구 문명을 적극적으로 수용할 수 있었을까. 그런데 조선은 왜 이토록 당연해 보이는 것에서 멀찌감치 떨어져 있었던 것일까.
먼저 시간 감각이다. 메이지 유신의 주체세력인 이와쿠라 사절단은 유럽 사회를 벤치마킹하면서 유럽의 산업혁명과 부강한 유럽의 건설이 그리 오래전의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파악했다. 유럽조차 근대, 전근대, 탈근대가 섞여 있고 대부분의 성과는 최근에 이뤄진 것임을 알아낸 것이다. 오쿠보 도시미치는 각국의 공장(미국 20개소,영국 53개소, 프랑스 12개소, 벨기에 10개소 등)을 견학하는 도중에 사이고 다카모리에게 편지를 보냈다.
그는 ‘영국이 부강한 이유를 알겠다.’라고 썼다. 그의 일기에는 영국의 주요 공업도시들이 열거되어있는데 훗날 ‘오쿠보 정권에서 식산흥업 정책을 어떻게 펼칠 것인가’에 대한 의도였을 것이다. 그런데 이와쿠라 사절단은 특이하게도 ‘언제부터 서유럽이 부강하게 됐는지’를 물었다. 자신들의 문명이 어떤 위치에 놓여 있으며 새로운 근대 유럽 문명과의 간극이 얼마큼인지 동시에 파악하려 한 것이다.
“『실기』에는 영국을 비롯한 유럽의 ‘오늘날의 부강’이 도대체 언제부터인가를 묻고 1800년 이후의 일이라고 답한다. 그것은 그때(1872년)로부터 겨우 40년 전의 일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언급은 이 정도 차이라면 후발 주자인 일본도 노력 여하에 따라서는 같은 대열에 합류할 수 있다는 기백조차 엿보인다.”
40년이라는 시간관념은 따라가는 입장에서야 그리 크게 느껴지지 않았다. 한편 서유럽 사람들에게는 한 세대 정도 앞선 것이었지만 그들은 마치 아주 오래전부터 그렇게 살아온 것처럼 생각했다.
그들은 낙후된 동양을 보며 ‘따라오려면 아득하다’고 느꼈을 것이다. 하지만 일본은 달랐다. 이 정도의 시간차라면 필사의 노력을 하면 추격 범위 내라고 판단한 것이다. 사절단은 귀국한 후에 영국이40년이라면 독일 등 나머지 선진국들은 30여 년쯤 됐을 것으로 추정했다.
“사절단은 유럽과 미국을 돌아본 뒤 일본과 구미의 격차가 30년쯤 된다는 것을 실감하고 조약 개정을 뒤로 미루고 일본의 문명개화의 속도를 높이고 내정안정 등에 박차를 가하는 기회를 마련했다.”
사절단은 서유럽 국가들의 역량이 너무도 뛰어나서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는 상대가 아니라고 판단한 것이다. 그런 일본이 근대화를 이루자 30년 전의 올챙이 시절을 까맣게 잊고는 조선을 향해 800년 이상 뒤진 야만의 땅이라며 얕잡아 보며 비웃고 조롱했다.
인간은 필연적으로 망각하는 존재일 뿐만 아니라 아예 단체로 망각하는 동물이다. 물론 한국인 입장에서 보면 너무나 터무니없는 편견이고 왜곡이다. 그렇지만 근대화를 보편적 규범으로 가정하고 볼때 조선은 뭔가 부족하고 낙후된 사회로 보였을 것이다.
30년이란 시간은 사회구조를 근본적으로 바꾸어놓을 수 있는 충분한 기간으로 전환기에 시대 감각을 갖는 것은 매우 중요했다. 한세대 동안 지속된 제도와 환경이라면 그것이 한 개인이든 사회든 원래부터 그렇게 살았던 것처럼 인간은 착각한다. 2023년 기준 스마트폰이 일상화된 지 겨우 15년밖에 안 됐는데도 이미 오래전 일처럼 느껴진다. 코로나19 때 팩스와 도장을 쓰는 일본을 보면서 저들이 얼마나 낙후됐는지 새삼 놀라웠다. 한 30년 이상 뒤졌을 것 같은 느낌이었다.
오늘날의 감각으로 보건대, 고풍스럽고 세련되고 멋진 프랑스 파리는 1870년경에 완성됐다. 오스트리아 비엔나도 1870년대 이후 헝가리 부다페스트의 국회의사당 등 주요 건물은 1890년대 완공됐다. 수백 년 전부터 완성된 것이 아니라 150여 년 전 만들어진 것이라고 할 때 우리의 느낌은 확연히 달라진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자신과 자신의 나라가 어떤 상황에 놓였는지를 먼저 파악해야 한다. 그렇지 않은 상태에서는 아무리 멋진 벤치마킹도 맞지 않는 옷이 될 수 있다. 무작정 듣고 보고 배운다고 해서 다른 나라의 성과가 복제되는 게 아니다. 어떤 사람은 비범한 일도 평범하게 만들고 어떤 사람은 평범한 일도 비범하게 만든다. 일 자체가 평범하거나 비범한 게 아니다. 일에 임하는 자세와 태도가 평범과 비범을 가른다. 그 출발점은 자신의 나라를 제대로 아는 것부터다.
조선에서 미국과 유럽을 최초로 다 돌아본 이는 민영익이다. 보빙사 대표로 미국을 방문했다가 미국 대통령 도움으로 유럽까지 돌아보았다. 서구 문물을 접한 그는 “어둠의 세상에서 태어나 빛의 세상을 보았다.”라고 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는 시대를 볼 줄 모르는 범재였다. 그는 반대로 개혁을 거부하고 구체제를 수호하는데 혼신을 다했다. 민영익이 누구인가? 1880년대 민중전, 민영휘(개명 전 민영준)와 함께 조선 정치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한 3대
거두였다. 역할로 보면 일본의 오쿠보 도시미치나 기도 다카요시쯤 되는 인물이다. 혹 누군가는 인정하고 싶지 않겠지만 당시 한국과 일본은 최상위급 인재들의 기량이나 공직에 대한 사명감을 두고 볼때 현격히 차이가 났다. 민영익의 안목은 곧 조선 엘리트와 권력자의 수준이었다.
Copyright ⓒ 저스트 이코노믹스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본 콘텐츠는 뉴스픽 파트너스에서 공유된 콘텐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