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컬처 노규민 기자] 코로나19가 휩쓸고 간 한국영화계는 진퇴양난(進退兩難)에 빠졌다. 감염 위험 탓에 극장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멈춘 사이 넷플릭스, 티빙, 디즈니+, 쿠팡 플레이 등 OTT 시장이 커졌고, 편안한 안방에서 시간 잘 가는 시리즈물을 시청하는 사람이 점점 늘어났다.
펜데믹 종료 이후 영화계는 침체의 늪에서 좀처럼 빠져 나오지 못했다. 관객 수가 뚝 떨어지면서 대형 멀티플렉스 극장 여러 곳이 문을 닫기 시작했다. 지난 몇 년 동안, 주요 배급사는 펜데믹 시기에 창고에 쌓여있던 영화를 방출했다. 촬영을 마친지 약 4~5년, 개봉 예정일이 2~3년 지난 작품이었다. 그러나 이들 영화 대부분이 흥행에 실패했다. "극장 관람료가 비싸다." "시간과 돈을 들여 굳이 극장에 갈 만큼 재미있을까 싶다"는 반응이 대부분이었다.
이제 창고에 남은 작품이 거의 없다. 그런데 신작 영화 제작이 예전만큼 활발하게 이뤄지지 못하고 있다. 흥행 실패'를 우려, 투자와 제작이 원활하게 이뤄지지 않아서다. 이런 상황탓에 '흥행보증수표'로 불리던 배우들도 넷플릭스, 디즈니+ 콘텐츠 쪽으로 눈을 돌렸고, 극장 영화는 캐스팅 자체도 어려워진 상황이 됐다.
2022년, 코로나19가 한창일 때 개봉한 '범죄도시2'가 1269만 명을 돌파하며 흥행에 성공했다. 이후 이 영화는 '믿고 보는 상업영화'로 자리매김, 2023년, 2024년 잇따라 개봉한 3, 4편 역시 1000만 관객을 넘기는 저력을 발휘했다. "재미있으면 본다"는 공식을 있는 그대로 보여준 것이다. 전작과의 비교, 작품과 관련한 호불호도 있었지만 '재미있다'는 입소문이 퍼지면서 관객은 주저 없이 돈과 시간을 투자했다.
1312만 명을 동원한 '서울의 봄'(2023), 1191만 명을 모은 '파묘'(2024)도 마찬가지였다. "재미있다"라는 입소문이 흥행의 결정적 요인이었다.
'서울의 봄'은 약 233억 원 들여, 개봉 2주 만에 손익분기점 450만 명을 넘겼다. 그해 개봉작 중 큰 제작비를 들인 대작 영화였다. 근현대사를 소재로, 황정민을 필두로 한 국내 대표 연기파 배우들의 열연과 김성수 감독의 정교한 연출이 호평받으며 입소문을 만들어냈다.
'파묘'는 제작비 140억 원을 들여 만든 작품으로, 최민식, 김고은, 이도현의 압도적인 연기력과 대살 굿 등 토속 신앙과 오컬트적 분위기를 접목한 신선한 연출로 '재미'를 이끌었다. '파묘'는 1151억 원의 매출을 달성, 제작비의 8배가 넘는 수익을 기록했다.
8편까지 제작이 예정된 '범죄도시' 다음 시리즈가 올해는 개봉하지 않았다. 그리고 매년 1편 이상씩 나오던 '천만 영화'도 아직이다.
올해 7월, 여름 흥행을 목표로 300억 대작 영화 '전지적 독자 시점'이 개봉했다. 한국영화계에서 손꼽는 규모의 대작이다. 개봉 자체가 제작사와 투자자 모두에게 부담일 정도였다. 손익분기점은 약 600만 명, 1편의 흥행 여부에 따라 2편 제작도 염두에 뒀다.
안효섭, 이민호, 채수빈, 신승호, 나나, 블랙핑크 지수 등 화려한 캐스팅을 자랑한 이 영화는 100만 명을 겨우 넘기며 흥행에 실패했다.
마니아가 많은 원작 팬들을 만족하게 하지 못한 것부터 빈틈이 보이는 시각 효과, 남녀노소 전 세대 관객을 사로잡지 못한 소재 등 패인은 여러 가지였다. '케이팝 데몬 헌터스'의 목소리 출연으로 존재감이 높아진 안효섭이 주인공인데도 효과는 크지 않았다. 초반 극장을 찾은 관객들로부터 혹평을 받고, 입소문을 타지 못했다.
이런 가운데 추석 연휴 직전 개봉한 연상호 감독 영화 '얼굴'이 '전지적 독자 시점'과는 다른 행보로, 값진 성과를 이뤄내 주목받고 있다.
'얼굴'은 앞을 못 보지만 전각 분야의 장인으로 거듭난 '임영규'와 살아가던 아들 '임동환'이 40년간 묻혀 있던 어머니의 죽음에 대한 미스터리를 파헤치는 이야기를 그린다.
연 감독이 '부산행' 이전부터 만들고 싶었던 이야기로, 탄탄하고 힘 있는 스토리가 인상적이다. 여기에 쫄깃하고 긴장감 넘치는 연출, 연 감독 초기작을 떠올리게 하는 날카로운 사회 비판, 1인 2역을 소화한 박정민부터 '얼굴' 한 번 드러내지 않고도 강렬한 존재감을 과시한 신현빈, 그리고 권해효, 임성재, 한지현을 비롯한 모든 배우의 호연이 완성도를 높였다. 그리고 이는 곧 '입소문'으로 연결됐다.
무엇보다 '얼굴'은 제작비 2억 원을 들인 저예산 영화로 100만 관객을 돌파해 눈길을 끌고 있다. 지금까지 누적 매출액은 약 104억 원을 달성, 한 달여 만에 50배가 넘는 이익을 거둔 셈이다. 저예산 영화가 극장에서 충분히 흥행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준 것으로, 침체한 한국영화 시장에 '희망'을 한스푼 얹어준 것과 다름없다.
박정민은 애초 노개런티로 출연 했고, 다수의 배우와 스태프들이 최소 개런티를 받고 작품에 힘을 보탰다. 모두가 '작품 하나 재미있게 만들어보자'는 마음으로 의기투합한 것이 이같은 결과를 만들어 냈다.
지금의 한국영화계는 그 어느 때보다 불확실하다. 지난 몇 년 동안 만난 대형 배급사 관계자들, 그리고 인터뷰에 응한 감독, 배우마다 하나같이 "힘들다"고 호소했다. 막대한 제작비와 초호화 캐스팅이 답이 아니란 건 진작부터 기정사실로 됐다. 관객 입소문을 유발할 수 있는 영화를 과연 어떻게 만들고, 내놔야 할지 머리를 맞대고 깊이 있게 고민할 시점이다.
뉴스컬처 노규민 presskm@nc.p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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