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십자군을 상징하는 깃발과 갑옷(사진=픽사베이)
십자군 전쟁은 흔히 ‘성지 예루살렘 탈환’을 명분으로 내세운 기독교 세계와 이슬람 세계의 대결로 기억되지만, 그 이면에는 중세 유럽 권력 구조의 재편, 교황권의 야심, 상업 도시국가의 실리와 군주들의 계산이 얽혀 있다.
예루살렘은 기독교·이슬람·유대 전통이 중첩된 상징공간이자 종말론적 상상력이 투사된 장소였다.
성묘 교회와 순례의 구원 신학, 무함마드의 승천 전승이 이 공간에 성스러움을 부여했지만, 실제로는 동서 교회의 대분열(1054) 이후 흔들리던 교황권의 권위를 수습하고 신성 로마 제국, 이탈리아 도시국가, 지역 제후들 사이에서 주도권을 확보하려는 정치가 이 명분 위에 깔려 있었다.
11세기 말 셀주크 투르크의 팽창은 비잔티움의 구조적 위기를 드러냈고, 황제의 구원 요청은 로마 교황 우르바노 2세가 클레르몽 공의회(1095)에서 전 유럽적 동원을 호소하는 계기가 되었다.
“데우스 불트(하느님이 원하신다)”라는 구호는 신앙적 열정과 사회경제적 동인을 한데 묶었다. 면죄와 토지·전리품 기대, 과밀·빈곤·상속 분할로 압박받던 하층과 제후·기사층의 이해가 교차하면서 원정은 ‘구원과 기회’의 이중언어로 번역되었다.
그러나 열광은 곧 혼돈이었다. 은자 피에르가 주도한 민중 십자군은 무장·보급·행군술이 부재한 채 오합지졸로 이동했고, 비잔티움은 ‘우군의 부담’을 신속히 국외로 밀어냈다. 그 결과 다수는 아나톨리아에서 학살되거나 노예화되었다.
뒤이어 프랑스·이탈리아 제후가 이끄는 정규 십자군이 출정했지만, 이미 동맹과 불신의 씨앗은 뿌려진 상태였다. 니케아 공략전에서 비잔티움은 선수를 쳐 성과를 가로챘고, 십자군은 “약속된 전리품”이 사라졌다는 박탈감 속에 목적을 ‘성지’에서 ‘소유’로 바꾸기 시작했다.
안티오키아에서는 매수와 내응으로 성을 얻었고, 굶주림과 탐욕이 결합해 무차별 학살이 벌어졌다. 이어진 식량위기는 마라(마라트 만)에서의 식인 기록 같은 극단으로 치달았고, “이교도 근절”이라는 도덕적 정당화는 인간성의 붕괴를 가렸다.
1099년 예루살렘 함락은 십자군 서사의 정점이었지만, 성지에서조차 학살과 약탈이 이어지며 ‘구원의 전쟁’은 ‘재산의 전쟁’으로 변질되었다. 동시에 템플·성요한·튜턴 등 군사·수도 기사단이 탄생했다.
그들은 순례자 보호와 방위를 명분으로 전투·금융·의료를 결합한 새로운 제도를 창안했고, 특히 템플은 예치·환어음을 통해 원거리 금융을 발전시켰다. 이 제도 혁신은 중세 말 상업·금융의 싹을 틔웠지만, ‘성전의 금융화’라는 역설을 남겼다.
이슬람 세계는 처음엔 십자군을 일시적 약탈군으로 보았지만, 에데사·안티오키아·예루살렘 왕국이 고착되자 전략적 대응에 나섰다.
그 중심에 살라딘이 있었다. 그는 이집트·시리아를 통합하고 하틴 전투(1187)로 기독교 군을 궤멸시킨 뒤 예루살렘을 탈환했다. 이에 그레고리오 8세는 유럽 3왕(신성 로마제국 프리드리히 1세, 프랑스 필리프 2세, 잉글랜드 리처드 1세)을 재소집했지만, 프리드리히의 익사로 독일군은 귀환했고, 필리프와 리처드는 아크레에서 협력과 경쟁을 반복했다.
리처드는 전술적으로 강인했으나 본토 정쟁(동생의 왕위 야심)에 발목 잡혀 살라딘과 휴전을 체결했다. 결과적으로 성지는 이슬람의 통치 아래 남되 기독교 순례의 통행이 허용되는 절충이 이뤄졌다. ‘영웅 서사’는 귀국의 정치로 대체됐고, 십자군 신화는 ‘협상과 현실’의 시간으로 접어들었다.
타락의 절정은 제4차 십자군에서 폭발했다. 교황 인노첸시오 3세는 젊은 카리스마로 ‘신정 정치’의 야망을 품고 이집트를 선제 제압해 성지를 되찾겠다는 청사진을 그렸지만, 원정 인력·재정·선단 모두가 부족했다.
베네치아는 단돌로 총독의 계산 아래 거대한 함대를 제공하는 대가로 천문학적 운임과 전리품 분배를 요구했고, 미달된 병력과 자금은 빚으로 전환되었다.
채무 탕감을 위해 십자군은 같은 기독교 도시 자라를 공격했고, 파문과 재허락이 오가는 사이 ‘거룩한 전쟁’은 ‘대행 용병업’으로 속살을 드러냈다.
이어 비잔티움 왕위 쟁탈전에 개입한 십자군은 콘스탄티노플을 두 차례 공략(1203·1204)하며 제국을 유린했다. 수도의 교회·유물·재화가 약탈되고, 동서 교회의 신뢰는 돌이킬 수 없이 파괴되었다. 이 원정의 최종 승자는 성지가 아니라 베네치아의 상업패권이었다.
이후 십자군은 몇 차례 더 시도됐지만 성지 회복은 이루지 못했다. 그 사이 프란치스코는 무력 아닌 대화로 접근하며 성묘 교회에서 활동하는 ‘평화의 틈’을 만들었고, 이는 한동안 순례의 제도적 통로가 되었다.
그러나 큰 얼개에서 보면 십자군은 교황권의 권위 추락과 왕권·상인·도시국가의 부상, 기사단 금융과 무역로 재편, 동지중해 권력 균형의 변화를 촉발했다. 14세기 흑사병과 잇따른 기근, 백년전쟁, 비잔티움의 최후는 ‘성전의 시대’가 남긴 공백과 구조 변동 속에서 전개되었다.
십자군이 교황권을 강화했는가 약화했는가의 물음은 시대에 따라 달라진다. 초기엔 ‘면죄와 동원’으로 권위를 최대치로 끌어올렸으나, 전리품과 과세·면벌부 판매·성직 매매·교황령의 세속 경영이 일상화되면서 성스러움은 휘발되고 세속적 정당성만 남았다.
아비뇽 유수와 대분열은 교황권이 군주정치에 종속될 수 있음을 만천하에 드러냈고, 콘스탄츠 공의회는 ‘회의주의’로 권위를 재정렬했지만 범유럽적 ‘초월 권력’으로의 복귀는 불가능했다. 이 틈을 파고든 인물이 바로 르네상스 교황들이다.
식스투스 4세는 조카 추기경 대량 임명, 곡물 독점, 직위 양도, 매춘 면허세 등 노골적 재정정책으로 교황령을 ‘세속 국가’처럼 운영했다. 이는 대성당과 다리, 예술 후원을 낳았지만, 윤리적 정당성의 붕괴와 민심 이반도 함께 불렀다.
이노첸시오 8세는 마녀사냥과 메디치 후견으로 권위를 다지려 했고, 알렉산데르 6세는 그 정점이었다. 보르자 가문의 족벌 통치, 금권 콘클라베, 체사레·루크레치아를 중심으로 한 권력 네트워크, 연회와 추문으로 상징되는 생활은 ‘교회=구원 기구’라는 중세적 합의를 근본에서 흔들었다.
율리오 2세는 직접 갑옷을 입고 교황령을 확장하며 군사적 명성과 예술 후원을 결합(성 베드로 신축, 미켈란젤로·라파엘로·브라만테)했지만, 그 또한 ‘세속 군주’의 얼굴이었다. 십자군 전쟁의 궁극적 유산은 아이러니하다.
첫째, ‘성스러움’의 이름으로 대륙을 동원한 경험은 근대 국민동원의 원형을 예고했다. 면죄부의 영업 논리는 조세·채권·보험으로, 기사단의 예치는 은행과 신용으로 진화하며 상업혁명을 견인했다.
둘째, 종교가 정치·경제 시스템의 자원으로 전락할 때 발생하는 도덕적 붕괴를 세계는 목격했다. 자라와 콘스탄티노플의 약탈은 ‘목적이 수단을 정화할 수 없다’는 사실을 각인시켰다. 셋째, 타자에 대한 악마화는 내부 폭력으로 되돌아온다.
이교도에 대한 잔혹은 결국 동방정교 형제, 심지어 같은 도시의 신자에게로 향했고, 이 균열은 근대 종교개혁·전쟁으로 이어질 구조적 갈라짐을 예고했다. 넷째, ‘영웅’의 신화는 종종 귀국 정치 앞에서 초라해졌다.
▲ 십자군 전쟁은 11세기 말부터 13세기 후반까지 유럽의 기독교 국가들이 이슬람 세력으로부터 성지 예루살렘을 탈환하고자 벌인 일련의 군사 원정을 말합니다.
리처드와 살라딘의 대치가 휴전으로 귀결되었듯, 전쟁의 종결은 협상과 제도, 물류·보급의 현실 속에 있었다.
오늘 우리가 십자군을 재독해해야 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표면의 명분 뒤에 숨어 있는 동원 논리, 재정과 전리품의 회계, 도시국가의 상업전략, 종교 권위의 정치적 사용처를 읽어낼 때 비로소 반복을 피할 수 있다.
▲ 전쟁의 결과로 인해 기독교와 이슬람 간의 갈등은 더욱 심화되었으며, 이는 후에 유럽과 중동 지역에 큰 영향을 미쳤다. 십자군 전쟁은 단순한 군사적 충돌을 넘어서, 종교적 불신과 상호 적대감을 증폭시켰다. 이는 현대 사회에서도 여전히 남아 있는 종교적 갈등의 뿌리로 작용
‘거룩한 이름’은 쉽게 전용되고, 열광은 빠르게 제도화되며, 제도는 곧 권력의 언어가 된다. 십자군 전쟁은 우리에게 묻는다.
“당신이 믿는 대의는 어디에서 재원을 조달하고 누구의 장부에 합산되는가.” 성스러움의 어휘가 계급·상업·국가의 이해를 은폐할 때, 역사는 언제든 자라와 콘스탄티노플의 밤으로 되돌아간다. 종교적 정당성으로 전쟁과 학살을 합리화할 수 없다는 교훈, 권력의 오용과 탐욕이 문명 전체를 퇴행시킨다는 경고, 그리고 대화·통행·제도의 지혜가 결국 사람을 살린다는 단순한 진실—이것이 200년 십자군 서사가 오늘에 남긴 가장 값비싼 유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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