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컬처 이준섭 기자] 1926년, 일제강점기 한복판에서 나운규는 영화 '아리랑'을 통해 민족의 슬픔과 저항의식을 스크린 위에 새겼다. 그리고 99년이 흐른 오늘, 한 무대 위에서 또 다른 예술가들이 그 기억을 다시 꺼내 들었다.
오는 22일과 23일, 예술의전당 자유소극장에서 공연되는 극단 산의 무빙씨어터 '비욘드 아리랑'은 창작극의 진정한 실험 정신을 구현해낸다. 장르의 경계를 허물고, 매체 간의 협업을 전제로 삼는 이 공연은, 단순한 연극 무대를 넘어선 하나의 복합 예술 형식으로 주목할 만하다.
작품은 1926년, 일제강점기 조선의 시대정신을 상징적으로 담아냈던 나운규 감독의 무성영화 '아리랑'을 텍스트로 삼는다.
그러나 단순한 오마주도, 고전의 재현도 아니다. '비욘드 아리랑'은 '아리랑'을 기억하는 하나의 서사 구조이자, 그것을 다시 창작하는 동시대 예술가들의 자기성찰적 여정으로 변환시킨다. 무대 위 인물들은 단순히 나운규를 연기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만들고자 했던 영화의 정신을 무대 위에서 어떻게 되살릴 수 있을지를 끊임없이 탐색한다. 그 여정은 실패와 좌절, 반복과 충돌, 우연과 유머의 연속이며, 그 안에서 공연은 하나의 생명력을 획득한다.
공연의 가장 독특한 미학적 시도는 무대와 영상의 결합 방식이다. 단순히 배경 영상을 사용하는 데 그치지 않고, 배우의 몸짓과 카메라의 움직임, 실시간 영상 합성이 연극의 서사와 장면 구성 자체를 이끌어가는 구조를 띠고 있다. 배우는 연극적 연기를 하면서 동시에 영화적 장면에 존재하는 인물로 변주되고, 무대는 스크린이자 편집실이며 동시에 이야기의 골격이 된다.
무성영화 시대의 연기를 연구하고 모사하는 과정을 통해 배우들은 연기 자체의 형식을 재검토한다. 대사가 없는 시절의 표정, 움직임, 몸짓을 통해 감정과 서사를 전달해야 했던 당시 배우들의 신체 언어는 오늘의 배우에게 새로운 과제를 던진다. 더 나아가, 이러한 고전적 형식은 현대 영상기술과 충돌하면서, 완전히 다른 리듬과 호흡의 장면을 만들어낸다. 영상과 연극이 단순히 나란히 놓이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유기적 서사 장치로 재편된다는 점에서 이 공연의 미학은 전례 없이 독창적이다.
'비욘드 아리랑'이 의미 있는 이유는 기술적 실험성 때문만이 아니다. 이 공연은 분명하게 시대적 질문을 품고 있다. 나운규의 '아리랑'은 단지 영화 한 편이 아니라, 일제강점기 조선인의 집단적 트라우마와 저항의 상징이었다. 그리고 그 기억은 오늘날까지도 민족 서사의 중요한 축을 형성한다. 그 기억을 오늘의 무대에서 다시 이야기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 예술가에게 윤리적 긴장을 요구하는 일이다.
이 작품은 그 과제를 외면하지 않는다. 공연 속에서 극단의 단원들이 서로 토론하고, 실패하고, 의심하며, 결국 자신들이 왜 이 연극을 만드는지에 대해 묻는 과정은 곧 창작자들이 스스로에게 던지는 질문처럼 느껴진다. '지금 우리가 이 이야기를 다시 꺼내야 할 이유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관객에게도 고스란히 전달된다. 공연은 극의 형식을 통해 관객에게 무엇을 전달할 것인지에 대한 깊은 고민을 전제로 한다.
'비욘드 아리랑'은 장르 간의 경계를 무너뜨리는 동시에, 연극이라는 형식이 얼마나 유연하고 확장 가능한 매체인지를 입증해 보인다. 동시에 이 공연은 단순히 새로운 무대 기술을 보여주는 데 그치지 않고, 연극이 시대와 예술, 기억과 정체성에 대해 어떻게 발언할 수 있는지를 치열하게 사유하는 작품이다. 공연 전체는 영상과 무대, 전통과 현대, 코미디와 비극이 충돌하고 교차하는 다층적 공간이며, 그 안에서 관객은 단순한 관람자가 아니라 해석의 주체로 거듭난다.
결과적으로 '비욘드 아리랑'은, 오늘날의 무대 예술이 어떻게 고전의 기억을 소환하고, 이를 새로운 언어로 재배열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탁월한 사례다. 그것은 단지 과거를 반추하는 작업이 아니라, 현재를 구성하고 미래를 상상하는 창작 행위이기도 하다. 연극은 여전히 살아 있고, 그 생명력은 낯선 형식을 감내하면서도, 본질적인 질문을 잃지 않을 때 비로소 빛난다.
뉴스컬처 이준섭 rhees@nc.p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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