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재희 더봄] 나폴리는 뭐다? 나폴리는 피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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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재희 더봄] 나폴리는 뭐다? 나폴리는 피자다

여성경제신문 2025-10-09 10:00:00 신고

산텔모성(Castle Sant'Elmo). 나폴리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한다. /사진=박재희
산텔모성(Castle Sant'Elmo). 나폴리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한다. /사진=박재희

나폴리에 도착했을 때 하늘은 오래된 수채화 같았다. 파란 물감을 쓰려다 실수로 붓 씻은 물을 와르르 쏟아부은 듯한 잿빛 하늘. 햇살은 소심한 아이처럼 잠깐 얼굴을 내밀었다가 금세 도망쳤다. 하늘은 무겁고 어둡지만 내 마음은 가볍다. 이유? 나폴리에는 피자가 있기 때문이다.

피자 지름이 성인 어깨너비보다 길다. 아무리 커도 한 사람당 한 판. 나폴리 피자 /사진=박재희
피자 지름이 성인 어깨너비보다 길다. 아무리 커도 한 사람당 한 판. 나폴리 피자 /사진=박재희

25년 전, 동생과 함께 이곳에서 먹었던 피자는 내 인생에 남은 몇 안 되는 음식의 기적이었다. 이번에도, 우연히 찾은 피자집에서 그 기억은 그대로 재생됐다. 나폴리에서 피자에 배신당하는 일은 없다. 놀라울 만큼 싸고, 놀라울 만큼 훌륭하다.

아시겠지만 이탈리아에서 피자는 ‘둘이 나눠 먹는 음식’이 아니라 ‘한 사람 한 판’이 기본이 아닌가. 당연히 우리도 각자 한 판씩 주문했다. 커다란 피자를 받아 들고는, 서로 눈도 마주치지 않은 채 흡입했다.

피자는 언제나 그렇듯 대화를 줄이고, 허리 부피를 늘린다. 파바로티가 무대에서 고음을 올릴 때 뱃살이 덩실덩실 흔들렸듯이, 우리의 배도 어느새 무대에 오른 듯 당당했다. 여행의 기록은 결국 사진보다 뱃살로 남는 건지도 모른다. 맘에 안 드는 사진은 지워버릴 수 있지만 뱃살은··· 애석하게도 삭제가 어렵다. 긴 시간 백업본이 남는다.

나폴리의 중심 플레시비토 광장. 전체 전경에서 플레시비토 광장을 중심으로 도시 전체 위치를 파악한다. /사진=박재희
나폴리의 중심 플레시비토 광장. 전체 전경에서 플레시비토 광장을 중심으로 도시 전체 위치를 파악한다. /사진=박재희

배를 두드리며 향한 곳은 언덕 위의 산텔모성(Castel Sant’Elmo). 나폴리 전경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가장 높은 곳이다. 별 모양 성곽 위에 서자, 바다와 도시, 그리고 베수비오 화산까지 파노라마처럼 펼쳐졌다.

풍경은 압도적이었고, 나는 드디어 준비해 둔 ‘나만의 의식’을 실행할 때가 왔다고 느꼈다. 아이폰을 꺼내 저장해 둔 포르테나의 노래 <네아나폴리스> 를 틀었다. 원곡은 파바로티가 불렀고 많은 이들이 그의 목소리를 신의 선물이라 하지만, 내 귀에는 포르테나가 더 낫다.

음악 취향이란 늘 각자의 것이고, 괜히 고집스럽다. 그 고집 덕분에 나는 베수비오 화산을 배경 삼아 나만의 개인 콘서트를 즐겼다. 나 말고 관객은 미 선배 하나였는데, 공연 내내 표정이 산체스 골키퍼 같았다. 무표정의 극치. 기립박수 대신 하품을 참는 표정은 꽤 인상적이다.

도심으로 내려오니 플레비시토 광장(Piazza del Plebiscito)이 나타났다. 광장은 어마어마하게 넓었고, 중앙에 서 있으면 마치 내가 나폴리 인싸라도 된 듯한 착각이 든다. 반원형 기둥이 늘어선 교회와 왕궁이 서로 마주 보고 있어, 진짜 무대에 서 있는 기분이었다.

나는 괜히 노래 한 소절을 부르고 싶었지만, 후니가 재빨리 내 팔을 잡아끌었다. 덕분에 나폴리 시민들은 예고 없는 음치 공연을 피할 수 있었고, 도시는 평화를 유지했다. 후니는 이 도시의 진정한 수호자다.

산 젠나로 대성당(Duomo di San Gennaro) 안은 화려했다. 고딕과 바로크, 르네상스가 뒤섞인 건축물은, 딱 피자 같았다. 이것저것 토핑을 올렸는데도 어쩐지 조화로운 맛이 나는 피자. 스테인드글라스 사이로 빛이 들어오고, 내 그림자가 바닥에 길게 늘어졌다. 그 순간, 순수하고도 신성한 기운을 느꼈다.

하지만 그 신성한 느낌은 오래가지 않았다. 하필 조금 전 먹은 피자 기름 자국이 바지에 남아 있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경건함과 기름기는 물과 기름처럼 섞이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바닷가 산책로를 걷다 보니 **에그 성(Castel dell’Ovo)**이 우뚝 서 있었다. 이름 그대로 달걀과 관련된 전설이 있다. 시인 버질이 성의 기초에 달걀을 숨겨놨는데, 그것이 깨지면 도시가 무너진다는 이야기다.

나는 성을 바라보다가 “부디 그 달걀은 삶은 달걀이길” 하고 중얼거렸다. 미 선배는 못 말리겠다는 표정을 지었고, 후니는 “걱정 마, 우리가 달걀 안전 감시단이잖아”라면서 웃었다. “어디서 웃어야 되는 거야?”라며 내가 시비를 걸었고 비로소 셋이 함께 웃었다. 확실히 시시한 농담이라도 농담은 필요하다. 농담은 피곤을 조금 줄여주고, 발바닥이 덜 아프게 해준다.

오렌지 나무로 경계석을 세운 캠핑장의 밤 풍경 /사진=박재희
오렌지 나무로 경계석을 세운 캠핑장의 밤 풍경 /사진=박재희

우리는 더 걷지 않고, 나폴리를 떠나 폼페이로 향했다. 마침내 이름부터 장엄한 제우스 캠핑장에 도착했다. 오렌지 나무로 둘러싸인 캠핑장은 향기롭다. 마치 우리가 마시게 될 신들의 음료, 넥타르를 제조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흥분한 마음으로 텐트를 쳤다. 말뚝이 제대로 박히지 않아 몇 번이나 다시 고쳐 박아야 했다. 그리스 신화 속 신이나 영웅들도 늘 무언가에 걸려 넘어졌다. 그래도 스스로 텐트 말뚝을 박는 장면은 신화에 영 어울리지 않지만 그 허술한 부조화까지 무조건 마음에 든다. 

밤이 깊어지며 오렌지 향기는 더 짙게 밤공기와 섞여 흘렀다. 지금까지 만난 모든 캠핑장 가운데 제일 마음에 든다. 이름도 제우스라니, 그 자체로 반은 성공이다. 내일이 기다려진다. 25년 전 폼페이에서 눈물을 흘렸던 기억. 무엇이 그토록 나를 울렸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어렴풋이 오렌지빛 벽화가 떠올랐다.

빛이었을까 아니면 그곳의 말로 할 수 없는 공기였을까? 내일은 그 답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또 다른 무언가에 푹 빠지게 될지도. 설레는 마음에 잠이 오지 않았다. 그래도 괜찮다. 여행은 숙면보다 설렘과 더 어울리니까.

여성경제신문 박재희 작가 jaeheecall@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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