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리뉴스 이상명 기자] 글로벌 철강 공급 과잉과 자국 산업 보호를 앞세워 유럽연합(EU)이 철강 수입 규제를 한층 더 강화하겠다고 나섰다. EU가 기존 세이프가드 제도를 대신할 새로운 규정을 도입하겠다고 예고하면서 한국 철강업계에도 빨간불이 켜졌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새 규정이 시행될 경우 한국을 비롯한 제3국 철강 제품에 대한 수입 쿼터가 크게 줄고 정해진 쿼터를 넘기는 물량에는 최대 50%의 고율 관세가 부과될 예정이다. 특히 한-EU 자유무역협정(FTA)을 맺은 한국마저 예외 없이 포함된다는 점에서 업계가 빠른 대응책을 마련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7일(현지시간) 유럽연합 집행위원회는 공식적으로 철강 수입 규제 강화안을 내놓으면서 내년 6월에 만료될 예정이던 기존 세이프가드를 새 제도로 완전히 대체하겠다고 발표했다. 새 규정에 따르면 EU는 연간 면세 수입 쿼터를 최대 1,830만 톤으로 제한한다. 해당 수치는 2013년, 철강 수입이 본격적으로 늘기 전 수준을 기준으로 책정된 것으로, 2024년 쿼터(약 3,053만 톤)와 비교하면 절반에 가까운 47%나 줄어드는 셈이다.
정해진 쿼터를 넘어서는 물량에 부과되는 관세도 기존 25%에서 50%로 두 배 치솟는다. 미국이 모든 한국산 철강 제품에 50% 관세를 매기는 것과 사실상 같은 수준이다.
이번 규제는 유럽경제지역(EEA)인 노르웨이, 아이슬란드, 리히텐슈타인을 제외한 모든 제3국에 예외 없이 적용되며, FTA 체결 여부와 상관없이 일괄 적용될 전망이다. EU는 FTA 체결국들도 글로벌 공급 과잉에 일정 부분 책임이 있다는 점을 내세우며, 한국 등 FTA 국가에도 별도의 예외를 두지 않겠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이런 결정은 사실상 FTA의 취지를 무색하게 만드는 강경 조치라는 평가가 나온다. FTA가 통상적으로 무역장벽을 낮추고 자유무역을 지향한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처럼 광범위한 수입규제를 FTA 체결국에까지 동일하게 적용하는 사례는 매우 이례적이다. 유럽 집행위에서도 "FTA 국가들이 EU 철강 수입의 3분의 2를 차지하고, 이 중 일부가 공급 과잉을 부추기고 있다"며 정책의 형평성을 강조했다.
한국 철강업계에 미치는 충격도 만만치 않을 것으로 보인다. 한국무역협회 자료에 따르면 2023년 한국의 대EU 철강 수출액은 약 44억8000만 달러(한화 약 6조2,800억원)로, 단일 국가 중에서는 미국(43억4,700만 달러)보다 많은 최대 수출시장이다. 냉간압연강판, 열연강판, 스테인리스처럼 수출 비중이 큰 주력 제품들이 EU 수입 쿼터 축소의 직격탄을 맞을 가능성이 높다.
상황은 갈수록 더 어려워지고 있다. 지난 4월에는 세이프가드 내에서 한국산 철강 일부 품목 쿼터가 최대 14% 삭감된 바 있는데 이번 규제까지 더해지면 많은 기업들이 수출 물량을 대폭 줄이거나 EU 내 생산기지 확보, 제품군 전환 등 근본적인 전략 변화가 불가피할 것으로 보인다.
EU는 국가별 수입 쿼터 배정 방식에 대해서는 "추후 협상"으로 미뤄둔 상태다. 마로시 셰프초비치 EU 무역·경제안보 집행위원은 기자회견에서 "국가별 쿼터는 각각 다를 수 있고, 해당국과 협상에서 결정할 사안"이라고 설명했다.
이에 따라 한국 정부와 업계로서는 EU와의 협상에서 좀 더 유리한 쿼터를 확보하기 위한 치밀한 전략이 꼭 필요한 상황이다. 통상 전문가들은 기존의 수출 실적, EU 내 철강 수급 구조, 친환경 철강 비중 등 다양하게 협상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요인들을 꼽고 있다. 또 EU가 친환경 무역장벽을 동시에 강하게 밀어붙이고 있어 철강기업의 ESG 전략도 꼼꼼히 따져봐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정부는 이미 산업통상자원부 주도로 EU 측과 소통 채널을 가동 중이며 업계에서도 코트라와 무역협회를 중심으로 현지 시장 상황을 파악하고 대응 전략 마련에 들어간 것으로 알려졌다.
이번 규정안이 정식으로 발효되려면 아직 EU 의회와 EU 이사회의 입법 절차를 거쳐야 한다. 하지만 EU 집행위는 "세이프가드 종료 시점인 2025년 6월 말 이전에도 제도 시행이 가능하다"며 일찍 도입할 수 있음을 시사했다. 실제로 집행위가 "가능한 한 빠르게 입법을 마무리하겠다"고 밝힌 만큼, 내년 상반기 중 시행될 가능성도 있다.
이 같은 조치는 미국과 진행 중인 철강 관세 협상에서 유럽의 입지를 강화하려는 전략적인 포석이라는 해석도 나온다. EU는 미국과의 철강 관세 갈등 속에서 저율관세할당 협상을 이어가고 있으며, 자국 내 수입 규제 강화가 미국을 상대로 한 협상에서 지렛대 역할을 할 수 있다.
EU의 한 고위 관계자는 "이번 규정이 시행되면 미국과 협상할 때 철강 산업을 보호해야 한다는 논리에서 EU의 입장이 한층 강해질 것"이라고 설명했다.
포스코와 현대제철 등 주요 철강사들도 이미 긴급 대응 체제에 들어갔다. 한 철강업계 관계자는 "이번 조치는 단순히 관세 문제가 아니라, 구조적인 수출 축소라는 위기를 의미한다"며 "정부의 외교적 대응과 함께 업계 스스로 협상력을 높이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이번 EU의 조치가 '철강 산업의 대전환기'를 알리는 신호라고 분석했다. 공급 과잉과 친환경 전환이라는 이중 압박이 이어지는 상황에서 이제는 단순히 수출을 늘리는 것만으로는 부족하기 때문에 한국 철강 산업이 글로벌 시장에서 지속가능한 경쟁력을 확보하려면 근본적인 전략 변화가 필요하다는 의견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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