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사업이 커지면서 매트뿐만 아니라 금강약돌로 만능 그릇인 브랜드 산해진미, 돌침대, 불가마벽돌 등 약돌과 관련된 제품들을 계속 개발해서 직접 소비자에게 판매했다. 그리고 북한 물건을 원하는 곳이 있으면 어디서든 주문받아 납품도 해줬다. 오가피 원액도 그중 하나다.
이에 멈추지 않고 남북문화 교류사업에도 발을 담갔다. 한국 근대미술사를 집필 중이던 최열 교수가 북한의 미술 사료가 부족하다 해서 나름 도움을 드렸는데 이때 최교수가‘북한화가 이석호의 그림을 모아보는 게 어떻겠느냐’고 권했다.
그래서 약 40여 점을 모았는데 2000년 첫 남북정상회담이 열렸을 때 정상회담 기념으로 소공동 롯데호텔 로비(세계 기자들을 위한 프레스센터 설치)에서 ‘북한화가 이석호의 그림 전시회’를 열었다. 그리고 부산 롯데백화점 갤러리에서도 같은 이름으로 전시회를 개최했다.
돌아보면 금강약돌 제품화의 성공은 북한이 제시한 독점 반입조건을 내가 한동안 지키지 못했어도 믿고 기다려 준 점과 북측이 약속대로 다른 곳에는 금강약돌을 공급하지 않았던 것, 이 두 가지 요인이 작용하여 가능했던 것 같다.
북측이 계속 제때 물건 공급을 원활히 해줘서 원료 수급에는 어려움이 없었고 북한에서 필요한 물자를 보내 달라고 하면 내가 최대한 마련해서 유·무상으로 보내 주었다. 기억에 남는 것은 플라스틱 원료인 폴리에스테르, 설탕, 인쇄용지, 체육복 등인데 상표는 떼고 보내라고 해서 그리 해줬다.
전반적으로 북한에 생활필수품이 턱없이 부족하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때 요청하는 품목들을 보고 기본적인 생활 수준이 우리와 천지 차이란 걸 확실히 알았다. 그래서 여력이 닿으면 뭐든 도와주고 싶었다. 순수한 나의 마음에 북한도 고마워했다. 일부에서 지적하는 식의 ‘북측은 받으면서도 고압적’이라는 태도는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모든 해상 운송은 남포-인천 간의 삼선해운 또는 나진-부산 간 동룡해운을 이용했다. 단동 등 중국을 거쳐서 오는 물자는 쓸데없는 오해의 소지가 있어 일절 취급하지 않고 직거래만 했다. 평양과의 통신은 중국동포를 통했기 때문에 별문제가 없었고 대금 결제는 언제나 후불제였다. 거래가 다 끝난뒤 북한이 지정한 중국 계좌로 송금하면 결제가 마무리됐다. 반출된 상품값은 다음번 물건 반입할 때 정산했고 잘못 보내온 상품은 반품 처리도 가능했다.
여담이지만 여기서 나진- 부산간 컨테이너선을 운영한 동룡해운의 전용만 회장과의 일화를 소개하고 싶다. 전 회장과는 이미 대륙연구소 장덕진 회장의 저녁 초대 모임에서 인사을 나눈 적이 있었는데 1995년 내가 연길에서 북녘땅에 식량지원 사업을 한다고 하니까 자신이 타던 링컨 콘티넨털을 운전기사도 붙여줄 테니 쓰라고 내줬다. 당시 연길에서 제일 좋은 차가 전 회장의 링컨이란 말이 있었는데 결국 내가 직접 타고 다니진 않았지만 그 배려가 고마웠다.
전 회장은 당시 연길에서 내 안내와 편의를 봐 주던 박명준(現연변TV국장)동생의 외가 쪽 형님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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